완연한 봄, 진료실 안, 박오리는 혼란스럽다.
머뭇거리고 있다. 나와 주치의의 면담 치료가, 또한 내가. 나는 이 글을 쓰는 것조차 머뭇거렸다. 딱히 숨기고 싶은 것도, 심각한 얘길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럴까.
이번엔 무슨 말을 할지 생각을 안 해왔다고 주치의에게 말했다. 그는 그냥 편하게 말하라고 했다.
“에세이 수업이 끝나서 아쉬워요. 처음엔 아니었는데 나중엔 선생님도 수강생들도 다 스며들었어요. 보고 싶을 것 같아요.
수업이 끝나도 일주일에 한 편씩 쓰려고 했어요. 그래서 원래 오늘이 마감인데… 못 썼어요. 강제성이 없어서 그렇기도 한데요.
아빠가 등장하는 글을 두 번 써서, 이번엔 엄마에 대해 쓰려고 했어요. 아빠에 대해서는 생각을 많이 해봤고, 거리를 둘 수도 있는데요, 엄마는…. 제가 그런 연습이 덜 되었나봐요. 엄마에 대해 쓰기가 훨씬 어려웠어요.”
엄마.
“어느 날엔가 엄마가 출근하는 소리에 깼어요. 현관문이 여닫히는 소리요. 엄마를 배웅하려고 카톡 했어요. ‘다녀오세요.’ 엄마가 답장 했어요. ‘응. 좋은 하루 보내렴.’
그 말을 읽는데… 죄책감이 밀려왔어요. 좋은 하루 보내렴. 별 말은 아니지만요. 이제는 죄책감과 애정을 분리할 수도 없어요. 항상 앞다투어 밀려와요. ‘엄마는 일하러 가시는데, 나는 이렇게 누워있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아침 7시에 누워있는 게 뭐라고. 그런데도 죄책감이 들어요.”
그가 말했다.
“좋은 딸이 되고 싶은가봐요. 능력 있는 딸.”
“항상 좋은 딸이었어요. 항상 좋은 딸이었죠. 학교에서는 어두웠는데…. 학교 폭력을 당한 수준은 아니지만, 저는 교실에서 서열이 낮은 애였어요. 얌전히 책만 읽는 애. 별 것도 아닌 걸로 괴롭혔죠. 저는 어린애들 참 잔인하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제 책가방에 껌을 뱉었던 남자애가 생각나요.
그런 상황에서 부모가 절 지켜줬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학교는 가야지’하는 엄마였으니까요. 그 루트밖에 엄마도 몰랐을 테니까요. 학교가서 공부하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차례대로.
저희 집 애들은 다 학교에 적응을 못했어요. 제가 제일 나은 수준이었죠. 무르게 태어났거나, 무르게 길러졌을 거라 생각해요.
저는 대학교까지는 좋은 딸이었어요. 엄마는 지금도, 그냥 제가 잠깐 방황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제 능력이면 앞으로 늦더라도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 거라고 하시더군요.
… 어느새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네요.”
침묵.
“엄마에 대해서는 항상 좋게 말해왔어요. ”
이 날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엄마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으려 애쓴다.
"엄마는 권위적이지 않고 친구같고, 무엇보다 다른 엄마들처럼 제 학업에 목매지 않고. 물론 제 대학교 경쟁률도 몰랐을 때는 좀 놀랐지만요. 엄마는 자기 일이 중요해요. 자기 일이 중요한 사람의 일장일단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놀랐던' 걸까, 서운했던 걸까?
'일장일단'이라는, 합리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내 감정도 합리적일까?
“엄마는 저한테 너무… 커요.”
이것은 진실 그 자체. 커요. 제 마음 속에서. 엄마가. 엄마의 영향이라고 쓰기도 어려워요. 그것은 경계와 인과가 명확해 보여요. 나는 때때로 엄마와 나를 구분하지 못하겠어요. 이혼하지 않는 엄마에게 '배신감'을 느낀 것은, 엄마가 내가 아니란 걸 알게 되어서일까요. 계속 내가 마치 자신인 것처럼 굴었으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나에게서 떨어져나가서였을까요.
알고 있어요.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심히 곡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결국 이혼하지 않았을 때, 나는 엄마가 나라는 일부를 절단해내고, 아버지를 선택한 것처럼 느꼈어요. 내가 엄마를 대신해서 이렇게 싸워왔는데, 오직 당신의 편에서 아버지와 맞서 싸워왔는데 당신은 나를 배신한 건가요? 내가 차마 당신에게 할 수 없는 물음이란 걸 알고 있어요. 당신이 아플테니까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니까요.
"불안해요. 엄마가 없어질까봐. 이런 말이 비합리적이란 걸 알아요. 엄마는 딱히 아픈 데도 없어요. 그런데도 그래요."
주치의는 말했다.
"항상 어머니의 상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군요. 제게는 '이상적인 어머니의 상실'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들려요. 부모 중 한 쪽이 악역을 맡고 있는 경우, 다른 한 쪽을 이상화하는 일이 많지요. "
"진실을 마주하기를 두려워한다?"
"누구나 그렇죠.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중요할 것 같군요."
나는 대체 내가 뭘 '보고 싶지 않은 건지' 모르겠어. 그 보고 싶지 않은 진실이 뭔지 모르겠다고. 부족한 점도 있지만 우리 엄만 좋은 사람이야. 그걸 부정하기 싫어. 대체 나한테 무슨 말을 원하는 거야? 엄마가 나에게 잘못한 거라도 줄줄 더 늘어 놓기를 바라는 거야? 나는 이렇게, 그 시간이 '나'의 치료 시간임에도 주치의에게 뭘 바라냐고, 뭘 원하냐고 묻고 싶어진다. 의사는 의사의 일을 하는 것일텐데.
진료를 마치고 나서는 답답했다. 진도가 나가지 않는 느낌. 무언가 막힌 느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이제 꽤 오래 정신과 환자로 살다보니, 이것도 겪어야 할 과정인 것도 같았다.
나는 조금씩 엄마에 대한 불만을 꺼낸다. 그리고 급히 저울의 균형을 맞추듯 엄마를, 혹은 엄마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나를 합리화한다.
엄마는 나를 학교라는 폭력적인 공간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다.
엄마는 나를, 그리고 동생들을 너무 무르게 낳았다. 무르게 길렀다. (나는 내가 학교에 적응을 못한 것을 엄마 탓을 하고 싶다.)
하지만 엄마도 그 방법밖에 몰랐을 테니 이해한다. (나는 엄마라는 인간의 곤혹스런 상황도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똑똑한, 좋은 딸.)
엄마는 나를 믿어준다. (그러니 좋은 사람이야.)
엄마는 자기 일이 중요하다. (내게 관심이 없다.) 일장일단이 있다고 생각해요.(난 양면을 다 보는 똑똑하고 좋은 딸.)
엄마가 없어질까봐 불안해. 엄마 자체의 상실? 이상화된 엄마의 상실?
나는, 엄마 없는 세상이 두려운 것 같은데. 모르겠어. 그의 말이 맞는 건지, 어머니를 어떤 식으로 다시 보아야 내게 도움이 되는 건지, 대체 망할 '중요하다' 는 게 뭔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부분' 이 뭔지, 모르겠다고.
엄마는 지금 거실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는 사람인데,
나는 무얼 더 말할 수 있는 건데.
차라리 질문을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