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면서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이란 그저 두 개인 사이의 기분 좋은 동거를 목적으로 하는 계약이 아니라, 타자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인 경험이며, 아마도 현시점에 사랑 외에는 그런 경험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위해서는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갈망하는 타자, 나를 매혹시키는 타자는 장소가 없다.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자기 강제는 타자 강제보다 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좌절하는 자는 결국 자기 잘못이며 장차 이러한 죄를 계속 짊어지고 다니게 된다.
돈은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동일하게 만든다. 돈은 본질적 차이들을 지우며 평준화한다. 새로운 경계는 배제하고 쫓아내는 장치로서, 타자에 대한 환상을 철폐한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애가 아니다. 자기애를 지닌 주체는 자기 자신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는 부정적 경계선을 긋는다. 반면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명확한 자신의 경계를 확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질성이 제거된 타자를 사랑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다만 소비할 뿐이다.
이제 사랑은 상처와 급습과 추락의 부정성을 알지 못한다.
모든 삶의 영역이 긍정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사랑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소비의 공식에 따라 길들여진다.
그것은 변신이다. 사랑은 인간에게서 고유한 본성을 빼앗고 그에게 타인의 본성을 불어넣는다.
사람들은 자기 동일성을 버리지 않으며 타자에게서 그저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 할 따름이다.
축적과 성장을 향한 자본주의의 강박은 바로 죽음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무한정한 선택의 자유는 오히려 욕망의 종말을 재촉한다. 욕망이란 언제나 타자에 대한 욕망이다.
죽음을 향한 자유를 알지 못하는 자는 자신의 삶을 걸지 못한다.
사랑의 진정한 본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고, 다른 자아 속에서 스스로를 잊어버린다는 점에 있다.
사랑하는 자는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그러니까 오직 모순을 자기 안내 내포하고 있는 것, 모순을 자기 안에 품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지닌 것만이 살아 있을 수 있다.
타자의 침입은 주체의 정상적인 균형 상태를 깨뜨리는 재난이지만, 그 재난은 동시에 자아의 공백과 무아 상태에서 오는 행복이며, 결국 구원의 길이다.
죽음 속에서도 스스로를 유지 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 속에서 뿐이다.
소비 가능한 성적 대상은 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적 대상은 결코 나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다.
사랑의 사멸과 함께 사유도 파괴된다.
에로스의 힘을 동반하지 못하는 로고스는 무기력하다.
나는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하면서, 나는 당신 속에서 나를 다시 발견한다. 당신이 나를 생각하기에. 그리고 당신 속에서 나를 발린 뒤에 나는 나를 되찾는다. 당신이 나를 살아 있게 하므로..
이 책은 사랑에 실패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이 책은 사랑을 다루는 일을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