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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두 Aug 25. 2019

다음 사랑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

생각하면서 사랑하기 위해서

보통의 사람이라면 사랑을 하고 있거나 사랑을 할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사랑을 준비하고 있을 법하다. 세상에 당연한 것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나는 이것만은 사람이 가진 당연한 마음으로 생각한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 말이다. 그리고 사람은 사랑의 경험을 가질 수 있다. 적어도 이 글 제목을 읽을 수 있고, 마음이 동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군에 입대하기 전, 대학원 수업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에로스의 종말>. 한병철이 집필하였고 김태환이 옮기고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판되었다. 눈에 띄는 선명한 분홍색에 보라색 속표지를 가진 이 책은 100쪽이 조금 넘는 아주 얇은 책이다. 책은 이리 얇은데 인쇄된 글들은 가치가 뛰어나다. 알랭 바디우가 쓴 서문부터 본문, 그리고 옮긴이가 기술했을 용어 해설까지 모두 그렇다.


그러나 책에서 다루어지는 많은 가치를 느끼기는 정말 쉽지 않다. 이 책은 흔히 '위로가 되는 책'이라던가 자기 계발 서적과는 거리가 멀다. 책에서 다루는 예술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책의 깊이가 반절은 사라지고 철학적으로 헤겔과 플라톤을 이해할 수 없다면 거기서 남은 반절이 또 사라진다. 그나마 서문은 예술 혹은 철학에 다소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 책 내용을 선명하게 읽는 지침과 같다. 나는 책을 지금까지 세 번 읽었는데 그때마다 서문의 지침에 감사하고 본문의 통찰력에 감명받고, 용어해설의 도움을 받는다.


이런 작품이 언급된다. 멜랑꼴리아,라스폰트리에,2011

물론 책을 잘 이해하기 위해선 헤겔도 찾아봐야 하고 플라톤도 찾아보아야 한다. 책에 나오는 여러 예술 작품도 접해봐야 함은 물론이다. 더 잘 읽기 위해선 저자의 다른 책도 찾아보면 좋다. 그리하면 이 책은 그저 연인 간 사랑만을 다루지 않고 세계관을 확장시켜 논의할 수 있게 된다. 실제 책은 연인 간 사랑만을 다루는 내용이 아니다.


그러나 어디 책 하나 읽기 위해서 그러한 일들을 벌이라면 책을 읽을 염두가 나겠는가. 내가 구입한 책은 여기저기에 줄이 그어져 있고, 포스트잇 플래그로 덕지덕지 마음에 드는 문장들을 표시해두었다. 그 문장들과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이 책을 이해하는데 가진 도구, '연인을 사랑하는 경험', 혹은 '로맨스'를 가지고 책에 무엇이 좋았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책이 가진 가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란 그저 두 개인 사이의 기분 좋은 동거를 목적으로 하는 계약이 아니라, 타자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인 경험이며, 아마도 현시점에 사랑 외에는 그런 경험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연애는 그 사람의 현재를 만나는 것이고, 동거는 그 사람의 과거를 만나는 것이고, 결혼은 그 사람의 미래를 만나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연인의 현재 모습을 사랑하고(연애), 그런 모습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거를 이해하고(동거), 그런 사람과 미래를 설계하는 것에 대한(결혼) 내 나름의 설명이다. 사랑이란 기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상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짝사랑조차도 그러하다. 짝사랑에 있어서 우리는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던가?


사랑을 위해서는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대체 그 받아들임이라는 게 도통 쉬운 것이 아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왜 내게 연락을 자주 하지 않나, 이 사람은 왜 이런 식으로 말을 하나, 대체 왜 이 사람은 돈을 이런 데다가 쓰는가, 어째서 이 사람은 내게 사랑한다는 말 하지 않을까. 왜 이 사람은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하지 않을까, 이 사람이 나를 보고 싶어는 할까, 나는 이 사람에게 어떤 존재일까. 이런 경험을 허다하게 한다. 결국 나란 존재가 가지는 의미가 그 사람으로 인해서 부여된다.


내가 갈망하는 타자, 나를 매혹시키는 타자는 장소가 없다.

정말로, 보고 싶은 사람에 대한 갈망은 분명 함께 있지 않은데도 시작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상대를 보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사람은 어떠한가. 그 사람이 있을 법한 곳에 가보고 싶어 한다. 우연히라도 마주치고 싶어 한다. 있지도 않을 곳에서 그를 만났으면 하고 기대하기도 한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를 만나고 싶어 하게 된다. 정말 어디서나 그리워한다.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상대에 대해 모든 걸 정말 헌신하면, 그 순간 나는 정말 사라진다. 나는 사랑하는 대상 그 자체가 되어 버리고 그 속에서 내가 존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나는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된다.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받을 수 없다. 사랑하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상대와 나를 명확히 구분 지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내가 아닌 것을 향한 것이다.


자기 강제는 타자 강제보다 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건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함축시킨 문장이다. 그렇게 사고를 확장시키지 않더라도, 연인 간 사랑에서도 이는 동일하다. 연인 간 사랑에서도 자기 강제는 나를 상대에게 함몰되게 만든다. 내 환경, 내 기분, 내 감정 모든 게 그 사람의 것이 된다. 단지 내가 할 수 있었을 것이란 그 선택지가 있었단 이유만으로 말이다. 그런 채 헤어지면, 어떤 가수의 노랫말처럼 '어땠을까'라는 가정이 생긴다.


좌절하는 자는 결국 자기 잘못이며 장차 이러한 죄를 계속 짊어지고 다니게 된다.

그리고 그런 가정은 스스로에게 죄를 묻는다. 왜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왜 저 사람에게 나를 더 던질 수 있었는데 던지지 않았으냐,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 그저 사랑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나는 정말 그를 사랑한 것인가?


돈은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동일하게 만든다. 돈은 본질적 차이들을 지우며 평준화한다. 새로운 경계는 배제하고 쫓아내는 장치로서, 타자에 대한 환상을 철폐한다.

여기서 다시 신자유주의가 등장한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데 우리는 상대의 조건을 따진다. 외모, 학벌, 나이, 가족 등 그런 조건들은 다시 자본으로 전환된다. 사랑이 자본으로 전환되는 시대에서는, 내가 한 것이 스스로 선택한 사람을 사랑한 것인지 사랑할 만한 조건을 갖춘 자를 찾아서 선택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후자의 선택은 상대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나를 위한 선택이다. 상대는 나의 도구일 뿐이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애가 아니다. 자기애를 지닌 주체는 자기 자신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는 부정적 경계선을 긋는다. 반면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명확한 자신의 경계를 확정하지 못한다.

자본주의로 환산되는 조건을 고려한 사랑은 나르시시즘에 포함된다. 거기엔 타자가 명확하지 않다. 그 타자의 존재는 사실 나의 영역에 포함되는, 내 자본을 위한 도구이며 상대는 상대로 오롯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본의 일부이다. 그러면 내가 했던, 내가 하는 사랑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질성이 제거된 타자를 사랑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다만 소비할 뿐이다.

상대는 내게 소비된다. 사랑하는 상대는 내게 자본으로 치환되기에 적당한 조건을 가지고 그저 소비되는 주체일 뿐이다. 그 안에서 타자라는 주체는 존재하기 어렵다. 조건을 가진 타자는 명확한 경계를 가지고 있지 않아 도구적으로 이해되고 자본으로써 소비된다. 사랑받을 만한 조건을 갖춘 상대가 아니라 내가 소비할만한 자격이 있는 상대다.


이제 사랑은 상처와 급습과 추락의 부정성을 알지 못한다.

이런 환경에서 사랑은 온대 간대 없다. 조건을 서로 견주고 적당한 상대를 물색하는 시장만이 남아 있다. 상처 받기 무서워서 애매한 썸이란 단계를 둔다. 이별을 고려하는 것은 너무나 쉬워지고 상처 받는 것이 어려워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어려워진다. 사랑할 조건들보다 사랑하지 못할 조건들이 더 많다.


모든 삶의 영역이 긍정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사랑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소비의 공식에 따라 길들여진다.

단순히 자본으로 환산되는 풍토뿐만 아니라, 실제 할 수 있음(긍정성)에 영역에 있고 선택지가 언제나 존재하기에 연인의 존재는 언제나 대체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다(그리고 이 지점에서 저자가 말하는 신자유주의란, 단순히 자본주의가 아니라 긍정성이 과도해진 자본주의라는 것을 이해할 법하다). 대체 불가능한 존재는 내 삶에서 지우기 어렵지만 대체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다른 어떤 것으로 바꾸면 된다. 내 삶이 우선되고 내가 존재함이 먼저이기에 그 사람은 내 삶의 부산물로서 존재한다. 그런데 사랑은 그렇지 않다. 내가 존재하지 않고 흩어지는 게 사랑이다.


그것은 변신이다. 사랑은 인간에게서 고유한 본성을 빼앗고 그에게 타인의 본성을 불어넣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그 사람이 원하는 모습이 되고자 한다. 장소도 시간도 없이 그 사람을 그리워한다. 보고 싶어 한다. 심지어 헤어지고 나서도 그러하다. 어려운 점은 나를 상대에게 던지는 과정에서 내가 사라지면 도대체 상대는 나를 어떻게 사랑하느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동일성을 버리지 않으며 타자에게서 그저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 할 따름이다.

불분명한 경계에서 타인을 주체로 인정하지 못하고 도구적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은 성립되는 조건을 잃는다. 이때 나는 상대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고자 하고 확인받고자 한다. 상대가 가친 조건이 더 풍족하고 분명해지길 바라고 상대가 내게 충분히 어울리는 사람으로 변모하길 바란다. 나에게 어떤 가치를 가져다 주기를 바라며, 내게 자본으로 치환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져다주길 바란다. 이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하다 못해 사랑한단 말이라도 해달라고 한다. 이해해달라고 한다. 그러나 그건 자본으로 치환되기 쉽지 않다. 결국 마셔도 목이 마른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축적과 성장을 향한 자본주의의 강박은 바로 죽음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자본주의 안에서 도구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알고 있다. 상대에게 사랑받기 위해선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함을 직관적으로 이해한다. 내가 상대의 조건을 따지는 만큼 상대도 나의 조건을 따질 것이다. 그런 사람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한다. 더 나은 재력, 더 나은 학벌, 더 나은 직업, 더 나은 외모를 갖추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것을 할 수 있으므로. 자기도 또한 상대의 도구에 불과하다.


무한정한 선택의 자유는 오히려 욕망의 종말을 재촉한다. 욕망이란 언제나 타자에 대한 욕망이다.

바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실 상대는 충분히 대체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다 못해 사랑한다는 말조차 해주지 않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저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는 사람을 찾아가면 그만이다. 그 사람에게서 굳이 사랑받을 필요가 없다. 나는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타인이 갖고 있는 조건을 자본으로 치환하여 사랑할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을 찾는 환경에 끌려다닌다.


죽음을 향한 자유를 알지 못하는 자는 자신의 삶을 걸지 못한다.

그런 삶은 자신의 삶이 아니다. 내가 가지고 싶어서 가지는 삶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다는 자기 강제에 의해서 억지로 수행되는 과정이다. 내가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아도 실제로 그러한 성과를 성취한다 한들, 할 수 있음은 여전히 존재한다. 더 노력해볼 수 있는 상황에서 달아나 볼 수가 없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더 나아지길 노력하지만 성취란 언제나 도달할 수 없는 하늘과 같다.


사랑의 진정한 본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고, 다른 자아 속에서 스스로를 잊어버린다는 점에 있다.

결국 한계가 없는 할 수 있음의 풍토에서 사랑을 통해선 자신이 받고자 하는 것을 받아 낼 수가 없다. 사랑은 나를 변하게 한다. 그것이 행복하고 즐겁고 긍정적으로 여겨져야 하는데 제대로 된 피드백이 돌아오질 못하니 사랑을 하지만 갈망한다. 사랑해도 사랑하고 싶어 진다. 이것이 싫으면 자기를 잃지 않는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건 사랑이 아니라 소비다. 상대와 유희를 그저 즐기는 것일 뿐이다. 여기에 사랑의 모순이 있다. 사랑은 자신을 잊는 과정이지만 분명히 자신을 잃는 과정은 아니다.


사랑하는 자는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만약 그러한 한계가 없는 할 수 있음이 무너진 상태에서 사랑하면 어떨까. 타인과 나의 경계가 명확하고 상대는 반응도 분명하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흩어지지만 상대는 나에게 그것을 온전히 돌려주게 된다. 그렇게 나는 새롭제 정립된다. 나는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그러니까 오직 모순을 자기 안내 내포하고 있는 것, 모순을 자기 안에 품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지닌 것만이 살아 있을 수 있다.

사랑은 나를 상대에게 던지고 잊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내가 가진 본성을 잊게 한다. 나는 상대가 원하는 모습을 서서히 갖추어가는데 그것이 싫지 않다. 즐겁다. 행복하다. 그렇게 다시 또 내가 만들어진다. 내가 먹지 못하는 것을 먹을 수 있게 되고 내가 가보지 못한 곳에 추억을 만든다. 내가 해보지 못한 것을 시도할 수 있게 한다. 그런 것들을 하고 나서 돌아보면 어느샌가 나는 변해있다. 그런데 그것도 여전히 나다. 조금 낯선 나.


타자의 침입은 주체의 정상적인 균형 상태를 깨뜨리는 재난이지만, 그 재난은 동시에 자아의 공백과 무아 상태에서 오는 행복이며, 결국 구원의 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을 잃을까 봐 불안하다.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어 한다. 그러기에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사랑의 핵심 중 하나는 내가 변해가는 과정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내가 변해가는 과정이 불편하다면 그것은 사랑이라 이야기할 수 없다. 그것은 고통이다. 사실 나란 존재에게 바라지 않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죽음 속에서도 스스로를 유지 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 속에서 뿐이다.

나를 잊는 과정은 죽음과 같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능동적이고 행복하게 수행한다. 그저 갈망해서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 그 과정은 괴롭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상대에게 긍정적이 이미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얼마나 꾸미던가. 일찍 아침에 일어나는 일부터 번거롭게 상대의 연락에 대답하는 일들까지. 내 삶을 흩어지게 하면서까지 그걸 바라고 그걸 수행한다. 행복하지만 괴롭다.


소비 가능한 성적 대상은 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적 대상은 결코 나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다.

사랑해서 나를 잊지만 그 과정이 나를 다시 찾게 한다는 모순. 그것이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한다. 나는 대체 왜 저 사람을 사랑하는가. 저 사람은 사랑받을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가 나는 저 사람에게 사랑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나. 우리는 왜 사랑하는가. 내가 저 사람에게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저 사람은 날 사랑하는가. 나는 저 사람에게 어떤 가치이길래 저 사람은 날 사랑하는가.


사랑의 사멸과 함께 사유도 파괴된다.

이런 사랑이 없는 생활은 자신에 대한 사유를 하지 않게 한다. 그저 자본으로 치환되는 개념들을 더 축적하고 더 쌓아 올리면 그만인 것이다. 더 나은 학벌, 더 나은 재력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만 한다면 이 모든 가치들에 대한 사유를 할 필요가 없다. 결국 자본주의가 만연한 사랑은 사유를 붕괴시킨다. 상대에 대한 사유도 마찬가지로 대체 가능한 다른 존재를 찾으면 그만이다.


에로스의 힘을 동반하지 못하는 로고스는 무기력하다.

그렇게 '에로스의 종말'을 맞이한 환경에서 이성적인 사유는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으로 환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벗어나는 사랑을 해야 한다. 그것도 이렇게.


나는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하면서, 나는 당신 속에서 나를 다시 발견한다. 당신이 나를 생각하기에. 그리고 당신 속에서 나를 발린 뒤에 나는 나를 되찾는다. 당신이 나를 살아 있게 하므로..


  


책을 한번 읽어보길 권합니다.

저자의 다른 책을 함께 읽어 보길 권합니다. 그래야 신자유주의를 저자가 어떻게 이해하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문장은 책에 실린 순서와 무관합니다.

제 해석이 책의 해석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여느 해석이 그렇듯. 저 역시 오독하기도 하고 오해하는 인간입니다. 

이 글의 부제는 처음에 좀 달랐습니다. 그러나 대체 그러면 어디까지 논의해야 되는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넓어져서 이만큼만 다루어봤습니다. 그저 이 글을 통해서 책에 조금 관심간다면,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조금 닿음이 있다면, 그것으로족합니다.


덧붙여 제가 가진 책 속표지에는 제가 이렇게 적어두었습니다.

이 책은 사랑에 실패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이 책은 사랑을 다루는 일을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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