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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두 Aug 31. 2019

아니야 나는 괜찮아

여름에 떠오른 크리스마스 기억


모름지기 꼬마라고 하면 그런 말을 믿음직하다.


아침저녁으로 슬슬 날이 쌀쌀해지니 그 쌀쌀함에 옛 기억들이 묻어 나온다. 이건 아주 어릴 적, 그러니까 역사적으로는 90년대의 황금기. 그리고 그즈음으로 기억하는 단념과 포기에 대한 첫 번째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4~7살 사이였나, 사람은 5살 이전에 기억을 하기 힘들다고 하니 아마 5~6살쯤 기억인지 모르겠다. 지금이나 그 때나 아이들에겐 크리스마스라는 날은 좋은 날이다. 한 해 동안 착한 일을 하면 선물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선물을 받을 수 없다는 강령 같은 것을 잘 지키면 어쩐지 하얀 털 덥수룩한 인상 좋은 영감님이 자신에게 공짜 선물을 준다는 것 아닌가.


모름지기 꼬마라고 하면 그런 말을 믿음직하다. 어쩐지 희망적인 이야기 아닌가. 한해, 1년이라는 개념을 채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어쨌든 내가 그동안 잘 살아왔다면 누군가 내가 좋아하는 선물을 준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그러면 누구나 자신이 바라는 선물을 어느 정도 바라게 된다. 사실 산타의 존재를 믿지 않더라도 어쩐지 한 번쯤 바라볼 만한 것 아닌가. 믿는 게 나쁜 것도 아니고. 어른이 되어 로또를 사는 것이나 아이들이 산타의 존재를 믿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꼬맹이들의 꿈은 어른들이 지켜주고 싶어 한다는 것뿐.





나는 종종 눈이 팔려 엄마를 겨우 찾아다니기 일쑤였다.


기억이 어스름하다. 춥지만 따스한 느낌이 드는 겨울이었고 크리스마스였거나 그러한 시기였다. 그 어쩐지 크리스마스 시즌이라고 불리는 연말. 나는 그 날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 날은 해가 지고 난 저녁이었다. 가로등 주홍 불빛이 골목마다 비추고 있고. 꼬맹이였던 나는 두툼한 옷을 입고 엄마 손을 잡은 채 구미의 재래시장을 함께 돌아다녔다. 당시 나는 키 작은 꼬맹이었기에 내 시선은 어른들 허리춤에 겨우 오는 수준이었다. 나는 어른들 허리 높이에서 입김을 뿜으면서 엄마 손을 꼭 잡고 다녔다. 나는 종종 눈이 팔려 엄마를 겨우 찾아다니기 일쑤였다.


엄마가 왜 그때 시장을 나가봤는지 알 수 없지만, 당신 나름대로 크리스마스를 챙기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재래시장 골목골목에선 크리스마스를 알리기 위해 캐럴 음악이 나오고 있었고, 정말 분주히 엄마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시장엔 정말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건을 팔고자 상인들이 내다 놓은 갖가지 크리스마스 소품들을 내가 빤히 쳐다보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 모습은 마치 뭐랄까, 해리포터에서 나오는 그런 분위기와 비슷하다. 온갖 것들이 휘황찬란하고 어린 나는 정신없이 눈을 돌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충분히 어린 꼬맹이를 자극할 만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거짓말을 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어느 자그마하고 소박한 장난감 가게에 날 이끌고 간 엄마는 내게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골라보라 하였다. 왜 였을까. 나는 가게 입구에서 머뭇머뭇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의 시선은 문 너머에서 단숨에 어떤 장난감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로봇 장난감이었겠지. 사내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이란 게 별거 있겠는가 일단 자동차, 로봇이면 거진 반은 먹고 들어간다. 자동차가 로봇으로 변신한다? 그러면 두배 더 좋은 것이 사내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이다.


엄마는 내게 안으로 가서 무얼 골라보라 보채었다. 장난감 가게 주인도 어서 들어와서 보란 눈치였다. 그러나 그것을 사도 될지 망설이고 말았다. 그걸 고르고 싶었지만 동시에 고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장난감을 고르는 것이 엄마에게 부담이 될지도 모른단 느낌이었겠지. 어린 날에 난 부담이란 단어를 알지도 못한 채 이해하고 엄마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 나는 거짓말을 했다. 갖고 싶은 장난감이 없다고. 이게 아마 최초의 거짓말은 아니지만 기억에 가장 뚜렷이 남아있는 거짓말일 것이다. 엄마는 내게 다시 물었다. 정말 가지고 싶은 것이 없느냐고. 나는 눈동자를 문 너머 그 장난감에 고정한 채로 고개를 흔들며 없다고 답하였다. 난 당시 집안 사정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어린 꼬맹이가 무얼 알겠는가? 그저 그 장난감을 구입하는데 돈이란 것이 드는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게 쉽지 않다는 개념 정도는 이해했지 않았을까 한다. 적어도 엄마에게는 피해가 갈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가 참 으른스릅네"


아무튼 나의 이런 대답에 입구에 서 있던 장난감 가게에 주인은 엄마를 보고 "아가 참 으른스릅네"라고 말하였고 엄마는 겸연쩍게 웃고 내 손을 다른 데로 이끌었다. 아직도 그 꼬맹이는 서른이란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로봇 장난감 하나 쉽게 가지지 못한다.


눈치 보지 말며 살아야지 해도 그것이 참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대게 그렇듯, 우리는 누구나 눈치를 보게 되어 있다. 그리고 보통 그 첫 번째 대상은 부모이지 않을까. 어린 나이에 눈치를 보고 형편을 이해하고, 부담을 이해하고, 그 모든 단어의 뜻을 채 제대로 이해하기 전에 어린아이들은 그런 것을 이해한다. 그러다 운 좋게 나처럼 이런 기억을 갖게 되는 것이리라. 내 최초의 단념과 포기에 대한 기억이다. 더불어 어린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그 꼬맹이는 부모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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