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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Oct 26. 2022

깍두기

2022.10.26 수 

오늘은 아침에 기운이 좀 났다. 그래서 깍두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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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를 해야겠다 마음먹은 건 어제였다. 하지만 나의 무의식을 파고들어 가면 한 달 전부터 '배추김치의 대안'을 생각해왔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한 달 전, 엄마에게 받은 김치가 똑 떨어진 순간. 치솟는 불안. 집에 김치가 없다니. 나 어떡해? 


나는 바로 언니에게 '우리 집에 김치가 떨어졌다'는 SOS를 쳤고 언니는 알았다며 나를 다독였으며, 나는 그날 저녁 급히 언니네 집으로 가서 김치 두 덩이를 챙겨 왔다. 김치를 냉장고에 넣어놓자 비로소 후우, 안심이 되었는데 아마도 그 순간 나는 이 상황이 조금 싫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배추김치까진 하고 싶지 않은데 배추김치가 떨어지면 불안해지고 마는, 김치 덕후의 삶... 같은 것에, 무엇보다 김치에 대해서만큼은 너무나 의존적인 이 삶... 에. 


김치, 불안, 덕후, 의존성 같은 단어들이 뭉근하게 머릿속에 맴돌고 맴돌다 믹서기에 갈린 후 어제 하나의 단어로 튀어나온 것 아닐까. 그러니까. 깍두기. 그러니까. 내가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김치. 


어젠 아침부터 북토크 때문에 천안에 갔다 온 터라 기운이 쪽 빠져 깍두기를 떠올리기만 하고 할 수 없었다. 오늘은 아침을 먹자마자 레시피를 확인한 후 에버 노트에 사 와야 할 것들을 적었다. 무, 대파, 생강, 새우젓, 꽃소금(집에 다른 소금이 있지만 아직 소금 구분법을 모르므로 무조건 레시피에서 언급한 소금을 사용하고 있다.). 이어 선크림을 바르고 츄리닝을 입고 근처 마트에 가서 무 2개, 대파 한 단, 생강 제일 작은 거, 새우젓 제일 작은 거, 꽃소금 500그램을 사 왔다. 


그간의 요리 역사를 통해 내가 알게 된 건, 레시피대로만 만들면 실패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요리를 할 때마다 레시피를 벗어나 창의력을 십분 발휘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자기가 만든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맛이 없어서. 나는 의아해 물었다. 그냥 레시피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잖아, 뭐하러 힘들게 창의력을 발휘해? 친구가 대답했다. 그게 안 돼. 뭐가 안 돼? 시키는 대로 하는 거. 왜? 몰라. 아...


암튼, 나는 레시피가 시키는 그대로 하기 위해 이미 저울까지 마련해뒀던 터라 심혈을 기울여 그램수를 체크하면서 깍두기를 만들었다. 무를 깍둑 썰어 소금과 설탕에 절여놓고, 밀가루 풀을 만들고, 고춧가루, 소금, 설탕, 새우젓, 생강 간 거, 마늘 간 거, 멸치 액젓을 한 데 섞어놓고, 30분 타이머가 울리자 절여놓은 무를 가볍게 씻고, 그 위에 밀가루 풀과 양념을 넣고, 버무리고, 또 버무리고, 색에 감탄하고, 맛에 감탄하고, 락앤락 용기에 넣고, 꾹꾹 누르고, 드디어 깍두기 완성. 


하루 이틀 실온에 놔두었다가 냉장고에 넣으면 된다고, 레시피에 적혀 있었다. 


(두 세 문단으로 짧은 일기를 쓰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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