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에게도 고흐가 있었어
너와 얘기하고 싶어
네게 일주일 뒤쯤엔 답장을 받을 수 있겠지, 했는데 그날 밤 바로 답장을 받고 나선 정말 기뻤어. 혼자 큭큭 거리며 웃기도 했다. 그리고 네 편지 내용이 그 자체로 너무 따뜻해서 좋았어. 너가 고흐와 테오를 떠올린 것도 좋았구.
맞아, '고흐에겐 테오가 있었어'. 그리고 우리에겐 서로가 있나? ^^ 분명 힘든 삶이었겠지만 너 말대로 고흐는 테오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을 거야.
너가 언급한 그 책 <반 고흐, 영혼의 편지>는 나도 읽었어. 책을 읽은 후에는 여기저기에서 고흐와 테오에 대한 글을 더 찾아 보기도 했었어. 그리고 두 형제에 대한 여러 글들을 보며 나는 '테오에게도 고흐가 있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어.
처음엔 난 이 둘의 관계를 이렇게 생각했어. '불같은 열정을 지닌 한 불운한 천재 화가와 그를 옆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착한 동생.'
그래, 나는 테오가 착해서 고흐를 도와준다고 생각했어. 자기 삶도 빠듯한데 어떻게든 고흐가 좋은 여건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테오는 분명 착해서 그랬을 거라고. 물론 형을 향한 우정과 사랑도 있었겠지.
그런데 테오의 죽음을 보곤 생각이 바뀌었어. 너도 알지? 테오는 고흐가 죽은 후 6개월 후에 죽어. 고흐가 죽은 후 일도 그만두고 우울증을 앓다가 마비성 치매라는 진단을 받고 죽은 거지. 우울증이네, 정신질환이네 테오의 죽음에 붙여진 병명은 여러 개이지만, 난 그냥 자연사같아. 고흐가 죽자 테오도 그냥, 죽은 거야.
넌 이런 게 상상이 가? 누가 죽으면 내가 죽는 거야. 내가 한강에 빠지지도 않았는데 숨이 턱턱 막히더니 죽어. 그 사람을 잃은 상실감 때문에.
고흐에게 테오가 필요했던 만큼, 테오에게도 고흐는 살아가는 데 무엇보다 필요하고 또 소중한 존재였던 거지. 겉으로 보여지는 면에선 고흐가 테오에게 받은 게 많아. 하지만 사실 둘이 어떤 식으로 연결돼 있고, 또 어떤 식으로 관계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거야. 특히, 고흐가 테오의 영혼에 미친 영향 같은 거.
별이 빛나는 밤에 너를 통해 정은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난 매번 기분이 조금 묘해져. 과거에 놓고 온 줄 알았던, 그래서 다신 못 볼 거라 생각하던, 어떤 작은 말랑말랑한 물건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해봐. 그런데 자꾸 너가 그 물건에 대해 내게 이야기하는 거야. 심지어 넌 그 물건을 자주 보기도 한데. 그때마다 난 자꾸 흐릿한 과거로 돌아가 그 물건을 찾게 되는 거지.
어린 시절, 정은이는 너랑 친한 친구로서 내게 의미가 있었고, 왠지 조금 차가워 보여 난 그 아이에게 다가가기가 힘들었어. 그런데 나와는 달리 너는 정은이와 아주 가까웠지. 너를 통해 알게 된 정은이는 결코 차가운 아이가 아니고 따뜻하고 진중한 아이였어.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정은이의 그 면은 변하지 않은 것 같아.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 아일 차갑다고 생각했던 건, 아마 정은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어른스러워서였던 것 같다. 푼수 떼기였던 난 그런 정은이의 어른스럽게 정돈된 모습이 차갑게 느껴졌던 거고.
결국 정은이를 차갑게 느꼈던 이유는 내가 푼수 떼기여서였네. 난 이런 식으로 대부분의 것을 보고 있겠지? 내가 푼수 떼기인 줄은 모르고 정은이를 차갑게 봤던 것처럼, 나를 내가 보는 많은 것들로부터 떨어뜨려 놓은 채 그것들을 판단하고 해석하면서 말이야.
암튼, 언제고 정은이를 만나봐야 겠어. 못 본지 십년은 족히 넘은 것 같다.
고흐의 방아, 그리고 너 혹시 이반 일리치라는 신부님 알아? 푸에르토리코 출신 신부님인데, 지금 읽는 책에서 이 신부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그 신부님은 친구들하고 모임을 할 때면 항상 촛불을 켜 놓는다고 해. 촛불을 켜 놓는 이유는 그 모임에 언제든지 제삼자가 끼어들어도 좋다는 표시라는 거야. 이 글을 읽으니 나도 이 매거진에 촛불을 켜 놓고 싶어 졌어. 누구라도 환영한다는 의미로.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