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나오고 며칠이 지나서 저녁을 먹는데 아빠가 고등어를 뒤집으며 말했다.
"그런데 작가 소개가 너무 밍숭맹숭한 거 아니야? 임팩트가 없던데. 이력을 안 써놔서 너가 누군지도 모르겠잖아."
"무슨 이력이요?"
"학교를 어디를 나왔다든가, 회사는 어디를 다녔다든가 하는 거."
"전 그런 거 쓰는 거 별론데."
"그럼 사람들이 네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
"그런 걸 써야지만 나를 아나. 프로그래머였다고 말하긴 했는데..., 난 지금이 더 좋아요."
나와 말할 땐 언제나 본인 의견을 끝까지 피력 못하는 아빠는 밥을 입에 넣고 잠시 생각에 잠긴듯 하더니 이내 말했다.
"그렇구나. 그럼 작가 소개는 네가 썼니?"
"아, 그렇다고 할 순 없어요."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는 작가 소개 스타일이 따로 있는지 모르겠다. 이 책 괜찮네, 이 작가 괜찮네, 하는 것처럼 이 작가 소개 괜찮네, 하는. 적어도 책을 내려는 사람이라면 '나는 작가 소개를 이렇게 쓰고 싶다' 하고 한 번쯤 궁리해보지 않을까. 아닌가? 혹 나만?
책을 읽을 때면 책날개에 적힌 작가 소개를 꼼꼼히 살피는 편이다.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 역시 목차, 서문과 함께 작가 소개를 들여다본다. 때로는 작가 소개만으로 그 책을 읽어야 할 충분한 이유를 얻기도 한다. 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 같은 경우. 이 책을 읽은 것도 작가 소개 맨 마지막 문장의 영향이 컸다. 길고 긴 이력을 거쳐 마지막 문장에서 저자는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자기 삶에 긍지를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우리나라는 그간 삶의 많은 면면에서 개인의 책임만 너무 강조해왔지, 수많은 개인들이 자기 긍정을 할 수 없어 괴로워한다면 사회의 책임을 논해야 하는 게 맞아, 이 책 꼭 읽어야겠다!
작가 소개를 꼼꼼히 읽으며 발견한 하나의 사실을 미리 말해두자면, 사실 대부분의 작가 소개는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이다. 몇 년에 어디에서 태어나 몇 년에 어느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몇 년에 어떤 책을 써서 어느 상을 받았고, 이후 출간한 책은 이거저거가 있다 하는 식. 때론, 책 줄거리를 읊다가 뚝 끝을 맺기도 한다. 여기에 약간의 유머가 들어갔느냐 안 들어갔느냐가 작가 소개의 이미지(?)를 좌우한다고나 할까.
며칠째 책상에 놓여 있는 가즈오 이시구로 책 <나를 보내지 마>을 봐보자. 열 두 문장으로 조합된 작가 소개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났다. (중략) 2017년 작품에 담긴 "위대한 정서적 힘"을 높이 평가받았고, "프란츠 카프카와 제인 오스틴을 섞은 듯한 작가"라는 평과 함께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월든>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181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에서 태어났고, 1837년 하버드대를 졸업했다. (중략) 1862년 5월 6일, 평생 동안 시달려 온 만성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물론, 모든 작가 소개 첫 줄이 작가의 출생년도를 밝히지는 않는다. 줄리언 반스의 <시대의 소음>을 볼까. 첫 문장이 이렇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맨 부커상을 수상한 영국의 대표 작가."
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어김없이...
"1946년 1월 19일 영국 중부 레스터에서 태어났다."
사실이 차곡차곡 나열된 이런 작가 소개는 당연히도 그 자체로 충분하다. 글 구성엔 임팩트가 전혀 없지만, 뭐, 사실, '노벨 문학상 수상'이나 '맨 부커상 수상'만큼 임팩트 있는 소개는 없으니까. 그래, 어차피 책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작가 소개 스타일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게 아니라 본문의 내용이지 않겠어? 그럼에도 소설 <불멸>의 작가 소개는 참 멋있지 않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75년에 프랑스에 정착하였다."
두 문장이 다다. 이게 누굴까.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나 1975년에 프랑스에 정착한 사람이. 두두 둥. 밀란 쿤데라다. 밀란 쿤데라의 모든 책에 이렇게 쓰여있진 않은데, 몇 권에 이렇게 쓰여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밀란 쿤데라가 어느 순간부터 작가 소개로 이 두 문장만을 밀었던 모양이다. 전 세계 출판사에 '작가 소개에는 꼭 이 두 문장만을 쓰시오. 안 그러면 판권을 주지 않으리다' 하고 엄포를 놓지 않았을까(확인할 길은 없지만).
하지만, 멋있기는 해도 내 스타일은 아님. 내가 좋아하는 작가 소개 스타일은,,,많이 소소해야 한다. 한참 정혜윤 작가를 흠모하던 때였다. 북 콘서트를 따라다니며 실물 확인도 하고, 그녀의 강렬한 스타킹 색깔에 눈도 멀어보고, 같이 셀카도 찍으려고 민망함을 무릅쓰던 때. 나는 <침대와 책> 매 꼭지에 밑줄을 그은 것도 모자라 작가 소개에도 밑줄을 죽죽 그었는데, <침대와 책> 작가 소개는 이렇게 시작한다.
"엄마는 나의 검은 피부를 싫어했고 나는 나의 갈색 피부를 좋아했으며, 엄마는 나의 헝클어진 머리를 싫어했고 나는 나의 부스스한 머리를 좋아했다. 엄마는 레슬링과 가요와 관광버스를 좋아했으며 나는 레슬링과 관광버스를 싫어했다. 우리는 많은 부분 통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엄마는 내가 책을 읽을 때면 항상 자기를 닮아서 애가 이렇게 책을 좋아한다고 칭찬하고 인정해줬다. 칭찬받을 일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 그 뒤로도 쭉 책 읽는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사랑받았다."
나는 정혜윤 작가의 작가 소개를 읽으며 사람을 알게 되는 데 태어난 해나 출신 학교, 그간 받은 상이 무엇인지보다, '부스스한 머리'나 '레슬링', '관광버스'같은 단어가 그 사람에 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생각을 했다.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 작가 소개도 보자.
"1970년 경상북도 김천에 있는 한 빵집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평생 사서 먹을 빵보다 더 많은 빵을 그냥 집어먹으면서 자랐다. 빵은 둥글고 부드럽고 누르면 어느 정도 들어간다. 그런 점에서 그의 본성은 빵의 영향을 받았다."
위의 글을 읽고 '아, 김연수 소설가가 1970년에 태어났구나' 하고 알게 되긴 했지만, 나는 그가 1970년 생이라는 사실보다 빵의 영향을 받은 그의 본성, "누르면 어느 정도 들어"가는 그의 본성이 그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말한다고 역시 생각했다. 그래서 미리 다짐해뒀다. 나중에 책을 쓰게 되면 부스스한 머리, 레슬링, 관광버스, 빵에 영향받은 본성 같은 작가 소개를 쓰겠다고.
그러니 작년, 본문을 다 마무리하고 작가 소개를 써야 할 시간이 왔을 때 편집자님의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고 내가 어떻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작가 소개는 출판사에서 쓰는 거예요."
"네에? 작가가 쓰는 게 아니고요? 어? 이상하다. 제가 읽은 책들은 작가가..."
말을 하다 보니 깨달았다. 대부분의 작가 소개가 '거기서 거기'였던 이유, 생몰연도나 수상 경력 등이 주를 이루었던 이유, 출판사에서 썼기 때문이로구나! 아마도 <침대와 책> 같은 경우는 책의 분위기나 특성상 '그래도 됐기 때문에' 작가가 직접 썼을 테다. 그리고 아마도 편집자가 편집한 부분 또한 있을 것이다. 밀란 쿤데라쯤 돼야 자기 마음대로 작가 소개를 쓸 수 있다는 크나큰 깨달음. 그리고 어쩌면 다른 작가들은 작가 소개에 나만큼 열정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민망함. 왠지 나 홀로 아무도 없는 밤의 해변에 앉아 별의 개수를 세고 있는 것과 같은 외로움. 나는 치미는 외로움을 느끼며 15년 차 편집자님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내 첫 책의 작가 소개엔 기쁘게도 내가 원고 투고할 때 쓴 문장들이 얼마간 남아 있다. 편집자님의 배려였을까. 특히 아래는 서른 살 이후의 내 삶을 어떻게 하면 몇 문장으로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지 엄청 고민하면서 쓴 문장이다.
"서른 살에 회사를 그만두며 마흔 살까지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기로 계획했는데, 벌써 찾았다. 가능하면 평생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살고 싶다고 매일 생각한다(정말, 가능하다면)."
다 쓰고는 무지 뿌듯했는데, 이런 뿌듯함은 그런데 정말 나만 느끼는 걸까. 아무튼 다음 책 작가 소개에도 나는 내가 쓴 문장이 몇 개라도 들어갔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누가뭐라해도 작가 소개에 관한 집착을 놓지 않겠다는 말씀. 왜냐고? 그냥. 이것도 다 글 쓰는 재미 아니겠나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