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던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지 2년 조금 안 됐을 때다. 얼마 전에 창업한 옛 회사 동료가 사무실에 한번 놀러오라길래 정말 놀러가봤다. 같이 일할 때도 어딘지 공대스럽지 않은 듯 공대스러운 모습 때문에 눈길을 끌던 사람인데, 공대스럽지 않은 모습이 사업가 기질로, 공대스러운 모습이 사업 아이템으로 잘 버무려져 창업으로까지 이어진 모양이었다.
전자책 플랫폼을 개발해 판매까지 하는 회사였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전자책을 한 권도 읽어본 적 없었다. 또 앞으로도 전자책을 읽을 생각 또한 없었다. 전자책에 대한 나의 첫 이미지는 ‘위기’였다. 종이책의 위기. 종이책만이 줄 수 있는 풍요로운 경험이 사라져버릴 지도 모르는 절대절명의 위기. 편리함에 목을 매다가 잃거나 놓쳐버린 수많은 아날로그적인 것들에 종이책마저 포함되어 버린다면, 아우,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런데 그가 공대스럽지 않은 사업가 기질을 발휘하여 어찌나 능수능란하게 자기 사업 아이템을 잘 설명하는지 나는 그가 이야기를 끝마칠 즈음에는 생전 읽지 않던 전자책을, 생전 읽지 않으려던 전자책을, 더 늦기 전에 읽어야할 것같아 마음이 조급해지기까지 했다. 전자책은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이고, 찬양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느긋한 표정으로 할 말을 다 한 그는 이제야 내게도 말할 기회를 주려는 듯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는 입과 눈에 웃음을 머금고 요즘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내게 물었다. 글을 쓰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으므로 구체적으로 무엇에 관해 쓰고 있는지 묻는 말이었다. 그때는 첫 책 출간이 실패하고나서 얼마 안 된 시기였기에 구체적으로 뭘 쓰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놀고 있다고 말하기는 싫어 이리저리 말을 돌려가며 시원찮은 답변만 늘어놓았는데, 그는 답답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치고 들어왔다.
“그럼 출판은요?”
그때만해도 출간 실패담을 어디가서 떠벌릴 마음도, 기운도,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그의 질문에 나는 많이 당황했다. 이렇듯 난처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내가 능청스런 허풍쟁이가 되길 얼마나 바라 왔던가. 하지만 나는 그런 인간이 못 되므로, 결국 아무렇지 않은 듯 억지로 웃으며 출판하지 못했다고 대답할 수밖에. 그러자 그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말이 떠올랐을 때 짓곤 하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꼬치꼬치 물어왔다. 책의 내용이 뭐였느냐는 질문에 내가 “사랑, 자유, 의미 같은 것에 관해 써 봤어요.”하고 대답하자, 그는 짐짓 진지해지더니 내게 조언을 하나 해줬다.
“요즘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책이 뭔지 조사해봐요. 우선 독자에 맞춰 글을 쓰고 나중에 이름 알리고 나서 쓰고 싶은 걸 써요. 다들 그러는 거예요.”
‘다들 그러는 거예요, 다들 그러는 거예요.’
나는 그를 만나고 돌아온 뒤 한동안 이 문장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다들 그러고 사는데 나만 그러고 살지 않아 나 스스로 내 인생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세상의 끝으로 내동댕이 쳐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원래 남의 말에 잘 휘둘리지 않는데, 그때는 그의 말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렸다. 아무래도 출간 실패 후 많이 나약해져 있던 때인 것 같다. 그래서 실컷 나약해진 난 결국 이제는 되돌릴 수도 없는 과거를 떠올리며 그렇게나 하지 말자고 다짐했던 후회까지 하게 돼버렸다.
'그때 그 제안을 받아들였어야 했나.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바보같은 짓을 한 건가!'
원고 투고를 했다가 알게 된 한 출판사에서 기획도서를 제안받은 적이 있다. 내가 투고한 원고는 조금 어렵고(재미없다는 말이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관념적이라 출판이 어려울 듯하니 이쪽에서 제안한 주제로 일상의 에피소드가 가미된 대중적인 글을 써보라는 거였다. 출판사에서 제안한 주제는 ‘버티는 삶’이었다. 지금은 (내 삶 자체가 버티는 삶이다 보니 매우) 관심이 가는 주제이지만 당시에는 이 주제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 원고를 출판해줄 줄 알고 나갔던 터라 기획도서가 뜬금없게 느껴지기도 했고, 더군다나 그때는 기획도서라는 게 뭔지도 몰랐기에 괜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얼마 후에야 기획도서는 흔한 출판형태라는 걸 알게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냥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버티는 삶에 관해 글을 쓰는 시간이 즐겁지 않을 것 같다고.
어쩌면 그 주제로 글을 썼다면 나는 훨씬 빨리 책을 출간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출판사가 대중적인 주제를 정한 것이어서 어쩌면 책의 반응도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는 1년 넘게 쓴 원고를 완성한 뒤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고, 무엇보다 책을 쓰는 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처음으로 경험한 때이기도 했다.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힘이 드는데, 내가 쓰고 싶지 않은 글을 써야 한다면, 나는 정말이지 그 시간을 ‘못 버텼을 것’ 같았다.
이랬던 내가 오랜만에 만난 전 직장동료가 한 말, 본인은 내뱉자마자 잊었을 그 말을 듣고 이렇게 한 순간에 무너져버리다니. 나는 며칠 모래에 의미없는 문장을 쓰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처럼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번 뒤숭숭해진 마음은 좀처럼 되살아나지 못했다. 그러다 순간 아주 당연한 생각을 해냈고, 이 생각이 다시 나를 일으켜세워주었다. ‘다들 그러는 거예요.’라는 말이 ‘나도 그래야 한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어 나는 나에 관한 진실 하나를 기억해냈다. 나는 지금껏 다들 그렇게 사는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살다가, 이제야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것.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해놓고 또 다시 다른 사람들의 삶을 기웃거려서는 안 되리라는 것. 나는 나를 다독였다. 자, 이제 그의 말은 잊자. 그리고 가던 길을 계속 가보자.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글쓰기는 그 자체로 힘든 일이므로, 글을 쓰는 즐거움은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있다’는 데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을 써야 할까, 내가 좋아하는 글을 써야 할까.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봤을 질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쓰다가도 글쓰기 책을 읽으면 글을 쓸 땐 독자를 염두에 둬야 한다고, 독자를 위한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하니 자주 우왕자왕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독자를 염두에 두라는 말을 이렇게 이해한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독자가 공감할 수 있게 쓰라는 말이라고.
정유정 소설가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녀는 그녀가 쓰고 싶은 주제에 관해 쓸 뿐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이 세상 그 누가 그리 악에 관심이 많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내가 악에 관심이 많으니 악에 관해 쓸 뿐이라는 거였다. 그래서 노력한다고 했다. 악에 관심없는 독자들도 내 글을 읽게 하려고. 내 글에 공감하게 하려고. 죽을 듯 노력한다고 했다.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라는 건 결국 이런 노력을 하라는 말이지 않을까. 그러니 나는 독자를 생각하기에 앞서, 나를 먼저 생각하고 싶다.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있는가? 응, 이라는 대답이 나와야 글을 즐겁게 쓸 수 있을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