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림 맥줏집에서 만날 때마다 애정 어린 꾸짖음을 선물하는 지인 S가 물었다.
"보름 씨, 책은 많이 팔렸어요?"
책을 낸 사람이 책이 잘 팔리고 있는지, 아니면 안 팔리고 있는지, 적어도 지금껏 몇 권이 팔렸는지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듯 말하는 S의 물음에 나는 왜 깜짝 놀랐을까.
"네?"
S는 그런 내가 얼마나 답답해 보였을까.
"네는 무슨 네야. 책 좋잖아. 그럼 많이 팔려야지. 뭐라도 해서 책을 더 팔아봐요!"
나는 뭐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책이 좋다는 지인의 말에 고맙다며 고객를 꾸벅이고는 괜히 맥주잔만 만지작거렸다. 맥주잔을 속절없이 만지작거려도 지인에게 뭐라 대꾸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맥줏집 창 밖으로 먼산이라도 있으면 먼산을 바라보고 싶은 심정. 그래서 나는 대꾸하는 대신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내가 뭘 할 수 있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나한테 홍보 수단이 있길 해, 아니면 내가 마케팅 하는 법을 알고 있길 해, 그것도 아니면 내가 유명인이길 해.'
하지만 궁시렁도 잠깐. 나는 맥주잔에서 손을 떼곤 나는 모르는 답을 그들은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S와 다른 지인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뭐가 있을까요?"
그러자 S가 앞장서서 답했다.
"우리야 모르지! 여하튼, 좀 움직여봐요. 뭐라도 해보라고!"
어느 작가가 트렁크에 책을 가득 싣고 다니며 서점이란 서점 문은 다 두들긴 끝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요즘엔 작가가 되기 전에 인스타그램 스타가 먼저 돼야 한다는 이야기 역시 들은 적 있다. 언젠가 어느 책에서 어느 편집자가 좋은 책이 잘 팔리는 것이 아니라 잘 팔리는 책이 잘 팔리는 거라는 오묘한 말을 한 걸 읽은 적도 있다. 책이 팔리는 데엔 책에 담긴 내용보다 내용 외적인 것들이 더 많이 작용한다는 이런 말들. 이는 사실이고, 이런 사실을 말하는 건 솔직함이고,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현명한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씁쓸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래도, 출판계는 조금 달라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 세상이 아무리 내용보단 포장에, 본질보단 외면에 더 많은 시간과 자본을 투자하는 세상일지라도, 출판계만은 달라야 할 것 같았다. 출판계가 취급하는 건 책이니까. 책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언가. 어떻게 보여져야 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보여지는 것에 집착하다가 놓친 수많은 것들에 관해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씁쓸함은 차츰 옅여졌다. 내용 외적인 것들에 의해 잘 팔리게 된 상품이라고 해서 그 상품의 질을 판가름할 수는 없는 듯하여. 포장이 예뻐 골라든 제품이 내용마저 실했다는 깔끔한 결말도 가능하니까. 영국 소설가 서머싯 몸의 일화를 생각해보라. 가난한 무명 작가였던 서머싯 몸은 어떻게하면 책을 팔 수 있을지 머리를 싸매고 궁리를 한다. 그러던 끝에 신문에 기발한 광고를 하나 낸다. 광고 내용은 이랬다.
‘나는 젊고 온화한 성격의 백만장자인데요. 최근에 서머싯 몸의 소설에 나온 여성과 같은 분과 결혼하기를 희망합니다. 본인이 그 여성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연락 주세요.’
이 광고덕에 서머싯 몸의 소설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만약, 서머싯 몸의 소설이 그저 그런 소설이었다면 그는 그저 그런 수많은 반짝 스타 중 한 명이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을 것이다. 하지만, 서머싯 몸은 그저 그런 소설가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기회를 만들고, 그 기회를 통해 자신의 소설을 세상에 알린 뛰어난 소설가였다. 이 일화를 듣고 누가 서머싯 몸을 탓할 수 있을까. 그는 스스로 노력한 끝에 우리가 아는 그 '서머싯 몸'이 되었잖는가.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런 생각을 버리지 못하겠다. 그럼에도, 내용이 좋은 책이 더 많이 알려지고 더 잘 팔렸으면 좋겠다는 생각. 유명인이 쓴 글이라서 그 책이 잘 팔리는 것이 아니라 유명인이면서 글도 좋기에 그 책이 잘 팔렸으면 하는 생각.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내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다. 그래야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고민하는 나를, 이런 나의 현재를 긍정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앞으로 계속 책을 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책들이 모두 좋았으면 좋겠다. 점점 더 좋은 책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조금씩 독자들의 신뢰를 얻게 됐으면 좋겠다. 이런 상상을 가끔 한다. 내 세 번째 책을 읽은 독자가 내 첫 번째, 두 번째 책도 사서 보는 상상. 그러고는 네 번째 책을 기다리는 상상. 나에게 계속 운이 따라서 일곱 번째 책을 낸 즈음에는 어느 전작주의 독자가 나의 첫 번째부터 일곱 번째 책까지를 모두 다 사 모으는 상상. 정말이지 기분 좋은 상상이다.
내가 이런 상상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알면 S는 또 혀를 끌끌 찰 듯하다. 그런 상상이나 하고 있지 말고 얼른 적극적으로 뭐라도 해서 태어난 지 몇 개월도 안 된 책을 더 알릴 생각이나 하라고 하겠지. 그러면 나는 상상을 멈추고 답 없는 고민을 또 시작하게 될 테다. 그러게, 난 뭘 할 수 있을까. 정말 뭐라도 해야 할 텐데. 그런데, 뭘? 누가 답을 알면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책은 낸 저자는 자신의 책을 위해 뭘 해야 하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