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잡지 뉴요커에는 오케이어(OK'er)라는 직책이 있다고 한다. 원고가 인쇄되기 전 마지막까지 글을 교열하는 최종 교열자다. 이미 몇 명의 교열자를 거쳐온 원고에 무슨 문제가 또 있을까 싶지만, 글을 써 본 사람은(글을 교열해 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글은 고치고 또 고쳐도 또 고칠 것 투성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만약 이미 한 달간의 검토를 끝낸 원고를 수정해 줄 '오케이어'가 존재한다면 그 글이 더 좋아질 게 분명하다는 사실을.
오케이어가 필요한 건 단순히 콤마를 넣어야 할 때 콤마를 넣지 않았거나, 누구나 다 아는 맞춤법을 틀렸거나 하는 등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글을 쓰다 보면 버젓이 사실관계를 틀리게 써넣을 수 있고, 자기도 모르게 모르는 걸 안다고 써넣을 수도 있으며, 무논리로 일관하거나, 감정이 과하게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런데 글을 쓰는 그 당시에는, 글을 쓴 그 당사자에게는, 이 모든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미 글이 눈에 익을 대로 익어 글을 낯설게 보기가 어려워서다.
바로 이것이 편집자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작가가 놓친 부분을 낯선 시선으로 봐주기 위해. 하지만 편집자 역시 그 글을 계속 읽다 보면 역시 그 글이 눈에 익는다. 1차 편집자가 놓치는 부분이 이래서 생긴다. 그래서 여느 출판사에선 교차 편집을 한다. 1차 편집자가 교정을 끝내면 2차 편집자가 나서서 그 글을 다시 봐주는 것이다. 이렇게 낯선 눈이 많이 거쳐간 글일수록 독자도 그 글을 '오케이' 할 확률은 높아진다.
하지만 책을 출판하지 않는 이상 내 글을 매번 읽어줄 편집자가 있을 리 만무. 어떤 작가들에겐그들의 글을 일차적으로 읽어줄 믿음직한 가족이나 지인이 항시 주변에 대기중이라는데, 우리 대부분에겐 그런 지인이 없다. 사실, 글을 쓰고 난 뒤 그 글을 남편이나 아내에게 보여준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도 결혼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가끔은, 아니 자주, 나도 내 글을 읽어줄 누군가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되니까. 빨리 알아내고 싶다. 내 글이 아무래도 좀 별론데 그 이유가 뭔지.
하지만 내 옆엔 내 글을 봐줄 편집자도, 남편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안경을 쓰듯 수시로 직접 ‘편집자의 눈’을 장착해야 한다. 소설가들이 소설을 쓰고 난 뒤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몇 개월씩 소설을 책상 서랍에 넣어 놓는 이유 역시 스스로 '편집자의 눈'을 장착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작게는 오탈자에서 크게는 글 전체 맥락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기 위해서 말이다.
시간이 많기만 하다면야 우리 역시 오늘 쓴 글을 한 달간 묵혀 놨다가 다음 달에 수정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오늘 쓴 글을 당장 오늘 저녁에 자체 마감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이럴 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시간을 다 쓴다. 아침에 쓴 글을 저녁때까지 시간차로 수정하는 식이다. 10시에 글을 썼다면 12시쯤 한 번 수정하고 15시쯤 또 수정하고 18시쯤 또 수정한다. 이렇게라도 해서 시간이 선물하는 '편집자의 눈'을 가져보려는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환경 전환을 통해 글을 낯설게 바라보는 것이다. 글쓰기 툴을 여러 개 사용한다. 그리고 그 툴 안에서도 여러 방식으로 글을 읽는다. 먼저 에버노트에 글을 쓴다. 다 쓰고 나서는 에버노트 크기를 바꿔가며 글을 읽는다. 가로로 길게 늘여서 읽기도 하고 세로로 길게 늘여서 읽기도 한다. 눈이 글을 낯설게 바라보게끔 만들기 위해서다.
에버노트로 할 만큼 했다 싶으면 이젠 MS 워드로 글을 옮긴다. 그러고는 글을 '인쇄모양', '웹모양', '읽기모드'로 바꿔가며 읽는다. 물론, 읽으면서 계속 수정한다. 마지막으로는 브런치를 이용한다. 일반 버전으로 읽으면서 수정을 하고는 '모바일 미리보기' 버전으로 읽으며 마지막 수정을 한다. '모바일 미리보기'는 모바일 크기로 글을 미리 읽을 수 있게 해 주는데, 이렇게 조그마한 화면으로 글을 읽는 것 역시 글을 낯설게 바라보는데 도움을 준다. 여기까지 했는데도 여전히 더 수정해야 할 것 같으면 스마트 폰으로 글을 옮겨 읽어본다. 이렇게 여러 가지 툴을 사용해가면서 글을 수정하다보면 결국 내 마음속에 '오케이'란 말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