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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Sep 10. 2018

나는 왜 책을 내려할까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 내보고 싶다는 바람을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실제로 작년 말에 만난 한 분은 따뜻한 유자차를 홀짝이며 회사 일로 바쁜 틈틈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책 한 권 쓰고 싶다.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책장에 꽂고 싶다. 그러면 내 인생도 꽤 의미 있어지겠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멋진 이유 같았다. 동기가 확실하니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결국엔 책을 내게 되겠지 싶었다. 요즘에는 독립 출판이나 자비 출판도 많이 하니 조금만 적극적으로 알아본다면 글쓰기를 좋아하는 누구나 책을 낼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분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나는 내 이름으로 된 책을 갖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 적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 이름이 새겨진 책을 책장에 꽂으며 설레하거나, 그 책장을 바라보며 기뻐할 나를 그려본 적도 없다. 책을 내려는 사람 중에는 본인이 이 세상에 태어난 흔적을 남기고 싶다고 말하는 이도 있는데 나는 내가 죽으면 다 끝이라고 생각하므로 이름을 남기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책을 내고 싶었다. 왜?


<밥벌이로써의 글쓰기>에서 소설가이자 글쓰기를 가르치는 존 로버트 레논은 이렇게 말한다.


"출간하고 싶어 하지 않는 작가는 드물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J.D. 샐린저 같은 작가를 제외하면 작가라면 누구나 출간하고 싶어 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샐린저는 책을 몇 권 출판하고 난 뒤부터는 출판을 위한 글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글을 썼다). 그러므로 굳이 '나는 왜 책을 내려할까'같은 질문은 할 필요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왕 던진 질문이니 끝까지 가보기 위해 존의 말을 계속 인용해볼까. 작가가 출간하려는 이유는 이렇게나 많단다.


"우리는 과시욕이 있기 때문에 출간한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출간한다. 우리에게 흥미를 일으키는 것을 알고 싶어서 출간한다. 특별해지고, 진실해지고, 용감해지고, 두려움을 느끼려고 출간한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나를 말리던 엄마의 말이 틀렸음을 입증하려고 출간한다. 다른 사람들이 출간하기 때문에 출간한다. 출간하는 사람에게 출판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출간한다. 작가 증정본을 받고, 직업을 얻고, 섹스를 하려고 출간한다. 뉴욕에 가는 명분을 찾으려고, 컨퍼런스에서 비판거리를 찾으려고, 비행기 안에서 자랑거리를 찾으려고 출간한다."


몇 개 정도는 '나도 그럴지도 모르겠네' 싶다. 나 역시 과시욕이 있을 테고, 특별해지고도 싶을 테고, 누군가가 출간하는 모습을 보고 출간하려 한 건 틀림없을 테고, 날 있으나마나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나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려고 출간하려 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던 무렵을 돌이켜보면 이런 욕구는 감지하지도 못할 만큼 미미했고, 나는 그저 아주 단순한 논리로 책을 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나는 글을 쓰며 살고 싶은데, 그렇다면 책을 내야 할 것 같아. 이 길밖에 뭐가 더 있겠어?’


책을 내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해 책을 내야겠다는 생각. 이 생각이 얼마나 현실적이고 합리적이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분명 직관적으로 명쾌한 이유는 아닌 듯하다. 누군가가 이렇게 물어본다면 어떨까.


“왜 책을 내려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이렇게 대답한다면.


“글을 쓰려고요.”


이보다는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 갖고 싶어서요”가 상대방이 더 쉽게 맞장구쳐줄 만한 대답 아닐까. 그리고 이런 내 생각은 어느 면에선 구식이기도 하다. 방송을 하기 위해 연예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처럼. 내 통통하고 귀여운 다섯 살 조카도 매일 유튜브를 보여달라며 울고불고 소란을 펴는 시대인데 말이다. 말해놓고 보니 정말 그렇다. 이 세상에는 책을 내지 않고도 글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글을 쓰려고 꼭 책을 낼 필요는 없잖아요? 블로그에 써도 되고, 일기장에 써도 되고요. 안 그래요?”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글쎄, 나는 왠지 조금은 울컥하며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전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싶었어요. 취미가 아니라요. 그러려면 책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요?”

“…?”

“여하튼 전 글을 통해 정체성을 확립하고 싶기도 했어요. 아, ‘정체성을 확립하다’ 라는 뻔한 말 말고 다른 말을 쓰고 싶은데… 여하튼, 왜 꼭 글로 정체성을 확립하고 싶었냐고 물으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 이유는 나중에 글을 쓰며 생각해볼게요. 그럼, 전 글을 쓰러 이만.”


작가들을 동경하고, 또 그들 삶의 방식 역시 동경했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내 정체성을 그들에게 맞추고 싶었던 건. 뒤늦게나마 내가 내향적인 사람이라는 걸 인지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이따금 숨을 쉬러 물 밖으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처럼, 나 역시 가끔은 사람을 만나 욕구를 충족해야 하지만, 나는 내가 혼자 있는 시간에 더 편안함을 느낀다는 걸 서른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혼자 있는 시간 동안 무얼 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고유한 인간이 된다는 것도. 그리고 나에게, 혼자 있는 시간 동안 무언가를 하는 사람의 이미지는 늘 작가였다.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되어본 사람만이 세상과 인간에 관해 진실한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작가들의 삶을 통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들은 거리 두기의 명수였고, 거리를 두면서도 사람들을 속속들이 관찰하는 데 명수였다. 작가들은 여러모로 종잡을 수 없어 보였는데, 특히 자기 자신을 형편없는 인간으로 치부하면서도 자기 애정이 심할 정도로 넘치는 게 인상적이었다. 외로움 때문에 타인을 갈구하면서도, 타인에 관해 신랄한 평가를 주저하지 않는 것 역시 내겐 매우 재미있게 보였다.  


나는 내가 무지막지하게 모순적인 사람이라는 걸 알면 알게 될수록, 작가들이 모순에 한없이 열린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부터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상대가 자신의 모순을 인정하지 않는 듯하면 답답함을 느꼈다. 인간에 대한 그의 옅은 이해도 때문이었다. 그런 만남이 있던 날에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얼른 씻고는 침대에 쏙 들어가 책을 읽으며 재빨리 작가를 만났다. 자신의 모순을 과감히 드러내면서 결국 인간을 드러내는 작가들은 내 롤모델이 되었다. 그의 삶이 진짜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책 속에 드러난 그들의 삶을 나도 따라 살고 싶었다. 그러니까, 막연한 이미지를 따라 여기까지 온 셈이 되네. 


여기까지 글을 쓰긴 썼지만, 글을 쓰느라 바쁜 작가들은 ‘나는 왜 책을 내려할까’ 같은 제목으로는 글을 쓰지 않는다는 걸 나도 잘 안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마당에 왜 이런 쓸데없는 질문에 답을 하느라 시간을 낭비한단 말인가. 작가들은 배고프면 밥을 먹듯 그저 글을 쓰면 책을 낸다. 그뿐이다.


작가들은 새로 받아 든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보며 감상에 젖는 것도 잠시, 머릿속으로 구상하던 다음 책을 쓰기 위해 오늘도 서재로, 작업실로 갈 뿐이다. 그런 그들을 붙잡고 왜 책을 내느냐 묻는다면 그들은 뭘 그런 걸 다 물어보냐는 표정을 짓고는 가던 길을 가겠지. 그리고 오늘치 글을 쓰기 위해 자리를 잡고 앉아 잠시 이런 생각에 빠져들 것이다. 


‘그러게, 나는 왜 책을 내려하지? 과시욕? 특별해지고 싶어서? 엄마한테 인정받으려고? 사랑받으려고? 다 맞나? 그래 그럴지도… 아, 그런데 그건 그렇고 오늘은 어디부터 써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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