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은 무릇 매혹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랬음에도 나는 매혹적인 첫 문장을 쓰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 첫 문장으로 홈런을 치려는 욕심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첫 문장으로 2루, 3루까지 질주하고 싶지도 않다. 딱, 1루까지만. 내가 쓴 첫 문장이 독자를 그저 딱 한 발 더 내 글 속으로 걸어 들어오게 해줬으면 좋겠는 마음뿐이다.
돌이켜보면 ‘그 책은 첫 문장이 참 매혹적이어서 내 맘에 쏙 들단 말이야’하고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아주 가끔 '이야, 이 첫 문장은 정말 탁월하다'하고 생각하게 되기도 하지만 이건 정말 아주 가끔이다. 올해 초에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었을 때가 바로 이런 아주 가끔에 해당한다. 책의 첫 문장은 이랬다.
"꽃은 자기가 사오겠노라고 댈러웨이 부인이 말했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문장인데도 나는 어쩐지 이 문장이 참 잘 만들어진 문장 같았다. 그냥 이유 없이 이 문장이 좋았다. 그래서 이 문장을 읽자마자 인스타그램에 "별 것 아닌 듯한 첫 문장이 마음에 든다"고 적어 놓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 소설이 <이방인>, <변신> 등과 같이 뛰어난 첫 문장으로 유명한 소설이었다는 사실! 그렇다면 내가 이 문장을 마음에 들어한 이유는 무얼까. 모르겠다. 뛰어난 작가가 쓴 뛰어난 소설이 이토록 소소한 문장으로 시작됐다는 점에 마음이 움직인 것인지도.
일 년에 몇 번 만날까 말까 하는 이런 예외를 제외하고는 나는 아무리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해도 그 책의 첫 문장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이야기가 좋아서, 인물에 반해서, 담고 있는 의미가 특별해서, 성찰의 힘이 빛나서, 그 책들을 좋아했던 거니까. 최근 1년 사이에 내가 재미있게 읽은 책들. 그렇다면 그 책들은 어떤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을까. <제인 에어>의 첫 문장은 이랬다.
"그날은 산책을 할 수 없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내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남들에게 들려주었으면 하는 유혹에 빠질만큼 스스로를 대단한 인간이라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읽고 있는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에서 첫 글의 첫 문장은 이것이다.
"호남 지방에 내려가 웬만한 식당에 들어가면 스무 가지 서른 가지 반찬이 그득하게 차려진 밥상을 받을 수 있다."
모두 매혹적이라 느껴질만큼의 문장들은 아니다. 솔직하고 사실적일 뿐이다. 지지부진하게 뜸을 들이는 대신 첫 문장부터 이야기의 핵심으로 바로 뛰어들어간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이다. 첫 문장에 반해 글까지 사랑하게 된 적은 거의 없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더러 있었다. 첫 문장이 호기심을 자극해 계속 읽어나갔더니 점점 힘이 빠지던 글들. 화려한 시작을 지탱하지 못해 스스로 주저앉고 만 글들. 이런 글들을 읽으면 마음이 꺼끌꺼끌해졌다. 마치 제목에 낚시 당해 클릭해봤더니 제목보다 못한 내용을 담은 기사를 읽을 때처럼.
독자로써 이런 경험을 했기에 나는 첫 문장을 쓸 때 힘을 빼면 뺐지 주지 않으려 신경을 쓴다. 내가 지탱할 수 있을 만큼만, 궁금증을 자아낼 만큼만 쓰자. 여기에 더해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거짓말을 하지 말자는 것(글 전체에 적용되는 지침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글을 시작하면서 더 조심하려 한다). 거짓 감정, 거짓 감성, 거짓 생각 (다른 말로 하면 과장된 감정, 과장된 감성, 과장된 생각)으로 문장을 치장하지만 않는다면 그래도 독자에게 배신감을 안겨주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첫 문장 앞에서 늘 우물쭈물 하긴 한다. 이 문장을 썼다가 지우고 저 문장을 썼다가 지운다. 이렇게 한 시간째 한 문장도 쓰지 못하고 있으면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면서 목구멍이 뜨거워지기도 하는데, 이럴 땐 왜 책에 묘사된 작가들이 하나같이 괴팍한 성미로 그려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에게 실망한 사람치고 괴팍하지 않은 사람은 드무니까.
하지만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을 나 역시 어려워한다고 해서 자기 자신에게 실망할 이유는 없다. 첫 문장 쓰기는 대체로 쉬운 일이 아니며, 때로는 돌아버릴만큼 어려운 일이 되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글쓰기를 거의 포기할만큼 어려운 일이 되기도 하니까. 그 대표적인 인물이 굴드다. 소설 <첫 문장 쓰지 못하는 남자>의 주인공. 제목에서 눈치 챌 수 있듯 그는 '첫 문장을 쓰지 못해 미칠 듯 괴로워하는 남자'다. 그가 얼마나 괴로워했냐면 첫 문장을 쓰지 못하겠기에 아예 첫 문장을 포기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첫 문장을 포기하고 두 번째 문장부터 쓰기 시작한 글은 도대체 어떤 모양일까? 이런 모양이다.
" (...) 바로 그 때문에 나는 거기서 멈추었다."
그런데 굴드의 괴로움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두 번째 문장이라고 해서 어디 그리 쉽게 마음에 들던가. 결국, 괴로움 때문에 두 번째 문장도 포기한 그는 세 번째 문장부터 쓰기로 결심했는데, 결심은 또 새로운 결심을 낳고 또 낳고 해서 결국 다 쓰인 소설은 이런 모양이 되었다.
"(...)(...)(...)(...)(...)(...)(...)(...)(...)(...)(...)(...)(...)(...)"
쓰길 원했지만 결국 쓰지 못한 문장 대신 점,점,점을 박아 넣어야 했던 굴드의 심정을 떠올릴 때면 나는 조금 힘이 난다. 나는 굴드만큼은 괴롭지 않은 것 같아서. 더더군다나 굴드가 첫 문장을 쓰지 못했던 건 그가 '완벽한 첫 문장'을 쓰려 했기 때문이지 않나. 나는 '완벽한 첫 문장'이 아닌 그저 '첫 문장'을 원하니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쓰면 될 일이다. 물론, 마음을 가다듬는다고 해서 첫 문장이 쉽게 나올리는 없지만.
첫 문장을 쓰지 못한지 이미 두 시간이 지났고 조금만 더 있으면 화가 머리끝까지 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도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을 때, 내가 쓰는 방법은 '첫 문장들'을 읽는 것이다. 책장으로 가서 이 책 저 책 펴 보며 책의 첫 문장들을 읽는다. 책장으로 가기가 귀찮을 만큼 지친 상태라면 인터넷 신문에서 칼럼을 찾아 읽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이 쓴 첫 문장을 읽다 보면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다시 감이 찾아진다.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깨닫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 역시 꽤 무난한 문장을 첫 문장으로 선택한다는 것을. 그리고 무난한 첫 문장으로도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