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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Oct 12. 2018

글을 쓰기는 싫지만 쓰고 나면 정말 좋다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 한 명이 여행 작가를 꿈꾸던 때가 있었다. 여행작가가 되겠다고 선언하고 나서 친구는 일주일에 한두 편의 글을 몇 개월간 꾸준히 썼다. 처음엔 마치 곧 책을 낼 듯 열의가 대단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친구는 글을 뜸하게 쓰기 시작하더니, 지난 한 달간은 단 하나의 글도 쓰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물으니 친구가 기다렸다는 듯 '여행 작가 포기 선언'을 하며 이렇게 말을 했다.  


“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어. 즐기면서 일하고 싶고. 그래서 글은 아닌 것 같아.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는 일이 상사 비위 맞추기보다 더 힘들어. 죽을 만큼 앉기가 싫어. 그렇다는 건,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잖아? 내겐 글쓰기가 즐겁지 않다는 거잖아? 이런 내가 어떻게 여행작가가 되겠어?”


친구의 말은 얼핏 들으면 다 맞는 말 같았다. 여행작가가 되려면, 여행을 좋아하고 글을 좋아해야 하는 건 기본일 테니까.  


친구는 여행을 정말 좋아한다. 그녀가 여행지에서 느끼는 감동과 감성의 깊이는 여느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이며, 실제 여행의 여운을 끌어안고 몇 년의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녀는 여행을 좋아하기 위해 그 어떤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유럽의 건축물 앞에서 자연스레 그녀 삶을 새로 조직하고 지난 삶을 되돌아본다.  


친구는 여행지에선 누구보다 건강한 사람이 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치지 않고 씩씩하게 세상을 둘러본다. 그녀는 낯선 곳에서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즐겁고 낯선 거리, 낯선 사람, 낯선 모든 것에 친근감을 느낀다. 그녀는 이 모든 일이 힘들이지 않고 즐겁게 벌어진다는 데 의미를 둔다. 여행이라는 행위가 친구의 내면과 딱 맞아떨어진다고 느낀다. 즐기면서 일하고 싶다는 친구에게 여행만큼 잘 맞는 일도 없는 듯하다. 그래서 그녀는 여행을 직업으로 두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글을 쓰려 했는데, 글은 즐겁지 않다는 것이다.


여행작가를 포기한다는 친구의 선언을 나는 말리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으니까. 몇 개월 시도해보다 그만 둘 일도 있는 거니까. 그렇다고 친구의 말에 동의를 한 건 아니었다. 만약, 친구가 글쓰기를 그만둔 이유(“글을 쓰기 위해 앉는 일이 상사 비위 맞추기보다 더 힘들어”)가 글쓰기를 포기할 합당한 이유라면 난 이미 몇 백 번은 글쓰기를 포기해야 했을 테니까.


내가 알기론 글을 쓰는 사람 대부분은 ‘글을 쓰기 위해 앉는 일’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영화 <300> 극본을 쓴 스티븐 프레스필드는 <최고의 나를 꺼내라>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여기에 진정한 작가는 알고 있지만 작가 지망생은 모르는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은 바로 이것이다. 글 쓰는 것 자체가 힘든 것이 아니라 진짜 힘든 것은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자리에 앉는 게 힘든 이유로 스티븐 프레스필드는 ‘저항’을 들었다. “저항은 어떻게든 우리가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는 것을 막으려 한다”. 우리가 열정을 발휘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하려 할 때면 (특히 글을 쓰려 할 때 가장 강하게) 우리 내면에서는 우리를 막아서는 저항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저항의 목적은 우리의 발전을 막는 것이며, 이는 주로 자기 합리화와 미루는 버릇으로 나타난다고 스티븐 프레스필드는 말한다.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에서 시인이자 소설가인 김형수는 ‘저항’에 대해 조금 더 쉽게 풀이해서 설명했다.


“작가가 글을 쓸 때 어떤 분들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서 그냥 휘갈길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중략) 쓰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엄두가 나지 않을 때가 많아요. 특히 빨리 써야 하는 숙제를 받으면 심리적 압박감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빨리 가서 써야 한다, 써야 한다.' 그래서 컴퓨터를 켰어요. 그럼 자리에 앉아야 하는데 이번에는 아무리 주저앉히려 해도 엉덩이가 의자에 닿지 않습니다. 조금 과장하면 마치 사형수가 형틀에 앉는 걸 두려워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선 자리를 뱅뱅 돌기도 하고, 때아닌 방 청소도 하죠. 그래서 앉혀지지 않으면 손톱을 깎습니다. 한참 그러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앉으려고 해도 또 앉혀지지 않아요. 이렇게 마음을 잡기 어려운, 몸이 잘 안 앉혀지는 증상을 일컬어 내적 저항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작가란, 김형수의 말처럼 “글쓰기의 내적 저항과 싸우는 것이 일상화된 존재”인 셈이다. 그렇다면 내적 저항은 왜 생기는 것일까. 이남희가 쓴 <나의 첫 번째 글쓰기 시간>에서 그 이유가 이렇게 설명돼있다. 


“글을 쓴다는 건, 심리적으로 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과는 정반대로 움직이는 행위이다. 음식을 만들거나 공부를 하거나 사람을 만나 대화할 때, 마음이라는 심리에너지는 외부 세계로 뻗어나간다. 마음의 흐름(지향성)이 음식이나 책, 사람에게로 확산되는 것이다. 그런데 글을 쓰려면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자신과의 대화다. 마음의 흐름, 심리에너지는 내부 세계로 향한다. 수렴 작용인 셈이다. 밖으로 흘러가던 에너지의 흐름을 갑자기 안으로 돌리려 하면 관성의 법칙이 작용해서 저항이 일어난다.”


글을 쓰려하면 어쩔 수 없이 내적 저항이 발생나기에, 내적 저항과 처절한 싸움을 벌이다 대게는 지고 마는 작가들의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읽곤 했다. 그래서 작가들이 글쓰기에 관해 쓴 에세이를 읽을 때면 마치 자학 개그를 보는 것처럼 웃음이 피식 날 때가 많았다. 웃음 뒤엔 잠깐이지만내면의 평화가 찾아오기도 했다. 나만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고, 딴짓을 하며, 의지력이 없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위대한 작가들도, 베스트셀러 작가들도, 글을 써야 하는데 도통 자리에 앉게 되지가 않는다고 한숨짓는다. 글을 쓰기 위해 앉는 대신 물을 뜨러 가거나, 대청소를 하거나, 커피 포트를 고치거나, 갑자기 겨울옷을 정리하는 등 컴퓨터 근처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하려고 든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더는 할 것이 없어지면 온 의지를 발휘해 자리에 앉는데, 그만 또 글을 쓰다가 벌떡 일어나 장을 보러 가야 할 것 같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식이다.  


그래서 어떤 소설가는 스카프로 자기 몸을 의자에 묶어버리기도 한다. 묶어 놓은 걸 잊고 일어나려 하다가 ‘아, 맞다!’하고 다시 앉아서 글을 쓴다. 어떤 작가는 골방에 스스로를 밀어 넣은 후 밖에서 문을 잠가 버리게도 한다. 또 어떤 작가는 먼지 한 톨이 보이지 않을만큼 책상을 깨끗하게 청소해 놓은 뒤 책상에 앉고 싶다는 기분을 서서히 끌어올린다. 또 어떤 작가는 강아지를 훈련하듯 앉아야 할 땐 앉게끔 자신 자신을 철저히 훈련한다. 


이런 에피소드들을 반복해서 접하다보니 나는 결국 이렇게 생각하게 됐다. 의자에 앉기 싫어 몸을 배배 꼬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나는 아무래도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가 보다’ 하며 글쓰기를 포기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고. ‘마음이 끌리어’ ‘저절로’ 여행을 즐기게 된 내 친구의 예처럼, 우리도 ‘마음이 끌리어’ ‘저절로’ 글을 쓰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이럴 일은 거의 없는 듯하니까. 글이란 게 원래 이렇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래서 이런 말도 있는 것 아닐까. 


"글을 쓰기는 싫지만 쓰고 나면 정말 좋다."


그러니 글쓰기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고, 글을 쓰며 사는 삶을 꿈꾸는 당신이라면, 당신의 내면에서 내적 저항이 일어났을 때 그저 이렇게 생각하며 그 순간을 받아들이는 건 어떨까. 


‘나만 이렇게 의자 주위를 빙빙 도는 건 아닐 거야. 서서 글을 썼다는 헤밍웨이나, 침대에 엎드려서 글을 썼다는 프루스트를 제외하곤 다 나처럼 의자에 앉기를 싫어했을 게 분명해. 조지 오웰도, 도스토옙스키도, 제인 오스틴도, 도리스 레싱도 다 이랬을 걸? 밀란 쿤데라도, 버지니아 울프도 ... 다 이랬을 걸?’


물론 나에게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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