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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Oct 22. 2018

글 하나하나를 완성하다 보면

3년 전 봄에 제주를 한 달 여행했다. 집 앞에서 달리기를 하던 중 '제주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달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 경험을 글로 쓰면 또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끝에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한 달간 제주를 시계방향으로 빙 둘러가며 달렸다. 처음 계획할 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달릴 생각이었는데, 그러진 못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매일 달리는 일이 보통 힘들지 않았고, 열 흘에 한 번쯤은 핑계를 앞세운 게으름이 승리를 거뒀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달리기를 하자고 처음 마음을 먹었을 때, 나는 '달리기'가 꽤 좋은 글감이라 생각했다. '달리다 보면' 절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 내용을 글로 옮겨 적기만 해도 '독자들에게 공감을 사는', 어쩌면 '마음에 반짝 빛을 밝히는' 글이 탄생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깨달음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 부실한 다리가 문제였다. 이제 막 달리기를 시작한 내게 달리는 일은 그저 이가 갈리게 힘이 드는 일일뿐이어서 달리다 보면 깨달음이고 뭐고 정말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달리는 내내 나는 그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되뇔 뿐이었다. 제주 바람이 맞바람으로 불어오기라도 할 시엔 세상에서 제일 질색인 게 바람이 되었고, 지금 여기에서 달리기를 포기하더라도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를 나무라지 않을 거란 생각에 거의 매일 포기를 염두에 둔 채 달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달렸다. 나는 왜 계속 달렸을까. 나를 계속 신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나에게 한 약속을 끝까지 지켜낸다면, 나는 나를 더 신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매일 달리기를 반복하다가 종달리에서 아침 달리기를 할 때였다. 아침을 먹기 전 7시쯤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와 해안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줄곧 5km를 달려오다 그날 처음으로 7km를 달리기로 한 날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부담이 많이 됐다. 달리기를 시작하자마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마음이 무거워지자 덩달아 다리까지 무거워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끝까지 달리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미리부터 앞섰다. 갑자기 짜증이 확 몰려왔고, 문득 지금이 딱 포기할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떠올린 것이 최인호 소설가와 법정 스님이 함께 펴 낸 대담집 <대화>에서 최인호 소설가가 한 말이었다.  


"신문에 연재소설을 쓸 때 “1천 회 연재라니 대체 그걸 어떻게 쓰십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하지만 처음부터 1천 회를 쓰는 게 아니지요. 1천 회를 생각하면 숨 막혀서 못 써요. 침착하게 1회 1회를 쓰다 보면 1천 회가 되는 거지요. 1회 쓸 때는 1회만 생각하고, 2회를 쓸 때는 2회만 생각하고요."


이 문구가 정확히 기억났던 건 아니지만 이 문구에 담긴 의미는 뚜렷이 기억났다. 1천 회 연재를 생각하는 대신 "침착하게 1회 1회" 써 나갔다는 소설가의 말을 나는 내게 적용해 이렇게 바꿨다. "7km는 생각하지 말고 침착하게 1m 1m만 생각하자." 7km를 못 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잊고 나는 눈 앞의 1m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1m, 1m를 끈질기게 되풀이했다. 그 날 나는 7km를 완주했다. 그 뒤 거리를 조금씩 늘려 여행이 끝나갈 즈음에는 10km를 달릴 수 있었다.


3년 전에 제주에서 달렸던 일과 최인호 소설가의 말을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러다 다시 떠올릴 계기가 지난 여름에 있었다. 친분이 있는 한 작가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해와서였다.  


"혹시 책을 쓰고 달라진 점이 뭐예요?"  


그녀는 책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다고 했다. 그분들에게 동기 부여가 돼 줄 말을 이제 막 첫 책을 쓴 저자들에게 구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질문에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그중 그녀에게 건넨 내 대답은 "책을 내기 전엔 글을 쓰고 있는 저 자신이 저에게도 조금 어색했다면 이제는 어색한 느낌이 많이 줄었어요."였다. 정말 그랬다. 책을 쓰기 전엔 '나'와 '글을 쓰고 있는 나'가 어색한 친구처럼 서먹서먹했다면, 이제 조금은 그 둘 사이가 편해졌다. 내가 나에 관해 그리는 이미지와 내가 매일 하는 일이 드디어 어느 정도 화합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글 하나하나를 완성하면서 느끼는 실감이었다. 글 하나를 완성할 때마다 예전보다 뿌듯함이 더 커졌다. 글을 하나 둘 완성하다 보면 언젠가 그 글들이 모여 책이 된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마치 "침착하게 1회 1회" 소설을 쓰다 결국 1천 회 연재를 끝낸 소설가처럼, "침착하게 1m 1m"를 달리다 어느새 7km를 완주했던 과거의 나처럼, 글 하나하나를 완성하다 보니 어느덧 책이 완성돼 있더라는 것.  


인생은 통제하기 어렵지만 오늘 하루는 통제하기 수월하듯, 책은 통제하기 어렵지만 글 하나는 통제하기 수월하다는 것. 통제하기 수월한 일에 최선을 다 해 통제하기 어려운 일마저 통제 가능한 일로 만들어버리기. 나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이 일에 전보다 능숙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책이 너무 쓰고 싶다거나, 지금 책을 쓰고 있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마음에 평화를 줄 것이다. 어찌 됐건, 이거 하나는 분명하니까. 너무나 당연하게도 하나의 글이 모이고 모여 한 권의 책이 된다는 것. 그러니 지금 내가 신경써야 할 건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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