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네 집에 2,3주에 한 번씩 놀러 온다. 한 번 올 때마다 짧게는 2박, 길게는 5박을 머문다. 집에서 편하게 입을 옷가지에 속옷, 칫솔, 책 몇 권을 챙기고, 또 잊지 않고 노트북도 챙긴다. 경험상, 노트북을 챙겨와도 쓰는 날보다 쓰지 않는 날이 더 많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이번 역시 노트북을 챙겨 언니네 집으로 왔다.
부모님과 내가 살고 있는 집에 있으면 어찌 됐건 내 하루는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지나간다. 아무도 내게 글을 써달라 요구하지 않았지만 나는 벌써 몇 년째 내가 만들어낸 압박 속에서 사는 데 익숙해져 있다. 다행히 아침에 글 하나를 완성하면 나머지 시간 동안엔 홀가분한 마음이 된다. 완성하지 못하면? 오늘은 아무 것도 한 게 없다는 생각에 몇 시간쯤 자책하다가, 저녁이 되면 삶이란 원래 계획대로 되지 않는 거지 하며 스스로 위로하다가, 밤이 되면 다시금 나라는 인간의 한계에 괴로워하다가, 내일 아침엔 더 나은 내가 되어 깨어나길 바라게 된다.
그렇기에 언니네 집에 온다는 건, 압박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도 있다. 작은 여행 같은 것이다. 지난 몇 주 성과가 어땠건 압박 속에서 시간을 보냈으니 이제부터 며칠 동안은 조금 편하게 지내자는 생각. 글을 쓸 땐 책에도 잘 집중하지 못하니, 이 며칠 동안에는 책도 실컷 읽자는 생각. 이런 생각을 좇아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2시간을 달려 언니네 오면서도 노트북은 꼭 챙겨 오는 것이다. 혹시라도, 글이 너무너무 쓰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특히 오늘 같은 날은 글을 쓰고 싶지 않더라도 꼭 글을 써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형부는 일을 나갔고, 조카는 어린이 집에 갔고, 언니 또한 외출 중. 창 밖엔 비가 오고, 거실은 어둑하고, 부엌 테이블엔 언니의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난 조명 빛이 비추고.
나는 테이블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한 시간째 글쓰기에 관한 글을 써보려 노력했다. 미리 생각해 둔 주제가 몇 개 있기에 그 주제들에 관해 어떻게든 풀어내려 해봤다. 그런데 잘 되지 않는다. 요즘 왜 이렇게 글쓰기가 어렵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저런 핑곗거리가 하나 둘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하지만 핑계에 굴복하지 말자고, 뭐라도 쓰자고 마음을 굳게 먹는다. 그런데도 첫 문장이 시작되지 않는다. 그래서 노트북에서 손을 내리고 우선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책이나 읽어보기로 했다.
언니네 집엔 조카가 '이모 방'이라고 부르는 방이 있다. 현관 옆, 조그마한 방이다. 방 한 면엔 책장이 있고 맞은편엔 소파가 놓여 있다. 소파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다리를 쭉 뻗으면 책장과 발끝 사이에 15센티 정도 거리가 생긴다. 나는 언니네 집에 오면 이 책장에서 눈에 띄는 책을 골라 소파에 앉아 읽곤 한다. 소파 옆에는 언니가 이런 나를 위해 준비해 둔 키 큰 조명도 하나 서 있다.
오늘도 이 방 책장 앞에 섰다. 무슨 책을 읽을까 찬찬히 훑어봤다. 책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래도 올 때마다 읽고 싶은 책이 한 두 권은 찾아진다. 오늘은 네 권을 골라 부엌으로 가지고 나왔다. 책을 읽다 보면 글이 쓰고 싶어 지곤 했다. 책을 읽다 보면 오늘도 글을 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기곤 했다. 오늘도 책을 읽다 보면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책장에서 빼 온 책은 총 네 권이었다. 노희경의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 박완서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장영희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김용규의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세 권은 예전에 읽은 책이고 한 권은 오늘 처음 읽는 책이지만, 오래전에 읽은 책이나 오늘 읽은 책이나 모두 내용은 생소했다. 나는 이 네 권의 책을 마치 한 권의 책을 읽듯 한 챕터씩 돌려가며 읽었다.
노희경은 사랑을 죽을 만큼 하지 않았던, 사랑의 영원성을 믿지 않았던 과거의 자기 자신을 탓했다. 박완서는 마당에서 잔디를 뽑는 일, 집 앞 숲을 바라보며 느끼는 평화, 6.25 전쟁의 참혹함, 소설을 통해 받은 구원 등을 이야기했다. 장영희는 우리의 현재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고 말했다. 김용규는 괴테가 쓴 <파우스트>의 내용을 빌어 우리는 오직 뉘우침과 죄의식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다.
네 권의 책은 모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형식 또한 모두 달랐다. 노희경의 글은 마치 시처럼 짧고 간명했으며, 박완서의 글은 긴 글 속에 의식의 흐름이 여유롭게 녹아들어 있었고, 장영희의 글은 늘 그렇듯 따뜻하고 생생한 에피소드를 담아내고 있었으며, 김용규의 글은 인용과 사유가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었다. 나는 네 권의 책을 한 챕터씩 다 읽고 테이블 한쪽에 쌓아두었다. 그러고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떤 내용의 글이라도, 어떤 형식의 글이라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