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시절, 언니 방에 놀러가면 언니는 라디오를 들으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몇 년 전에 부모님이 사준 미니 전축에서는 팝송이나 가요가 흘러나왔고 언니는 딱히 그 음악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안 듣는 것도 아닌 채로 영어 단어를 외우고 수학 문제를 풀었다. 그런 언니의 모습을 침대에 앉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선 신기한 감정이 가장 앞섰다. 어떻게 라디오를 들으면서 공부를 할 수 있지? 나한텐 정말 불가능한 일인데 말이다.
나는 귀로 뭔가를 들으면서 머리로 뭔가를 생각하는 데 영 소질이 없었다. 라디오를 듣고 싶으면 라디오만 들어야 했고, 공부를 해야 하면 공부만 해야 했다. 라디오나 CD를 들으면서 공부를 해보려고 시도한 적은 많으나 역시 결국은 다시 주위가 조용해져야 국어 지문이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나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공부한 적은 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차단막이 되어줄 때다. 주위 사람들이 대화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보다는 그나마 음악을 듣고 있는 게 집중이 잘 됐다.
나이가 들어도 멀티태스킹 능력은 결코 좋아지지 않았다. 인간의 뇌는 원래 멀티태스킹이 안 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보통의 인간보다 더 멀티태스킹이 안 되는 인간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 일만 늘어갔다. 저번에, 지도앱을 살피며 길을 찾을 때도 그랬다.
타고난 길치인 나는 지도가 없으면 옆 블럭 생선구이집도 혼자 힘으로 찾지 못한다. 그래서 길을 찾을 땐 꼭 10초마다 한 번씩 지도 앱을 탐구해야 한다(스마트 폰이 없을 때는 어떻게 약속 장소에 나가고, 어떻게 여행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은 지도를 아무리 봐도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내가 가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하며 길 한복판에 서서 당황하고 있는데, 알고 봤더니 내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어폰을 귀에서 빼자 그제서야 '머리가 돌아가며' 지금 위치와 목적지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나이기에 나는 책을 읽을 때에도 주위가 조용하길 원하고, 글을 쓸 때 역시 제발 아무 소리가 안 났으면 좋겠다. 몇 번인가 글을 쓰다가 너무 지루하고 심심해서 가사 없는 음악을 들어보기도 했지만 역시나 오래 가진 못했다. 그래서인지 글을 쓸 때 헤비메탈을 듣는다거나 매일마다 그 날 쓸 글에 어울리는 음악을 골라 튼다고 말하는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 마치 어렸을 적 내 언니를 지켜볼 때처럼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안톤 체호프 단편선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에서 단편 소설 '쉿!'을 읽을 때 남 얘기같지가 않았다. "신문에 글을 기고하는 삼류 작가"로 묘사되는 이반 예고로비치 끄라스누힌은 글을 쓸 때면 우스꽝스러울만큼 유난을 떠는데 특히 소리에 민감하다. 소설 제목이 '쉿!'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는 밤 늦은 시간에 귀가해 겁도 없이(!) 아내를 깨우고나서는 이렇게 호소하는 사람이다.
"앉아서 글을 써야겠어.... 아무도 날 방해하지 못하게 해줘. 아이들이 울거나 하녀가 코를 골면, 글을 쓸 수가 없다고... 그리고 차하고...비프스테이크가 있는지 알아봐 줘... 차가 없으면 내가 글을 쓸 수 없다는 건 당신도 잘 알잖아... 오직 차만이 내 작업에 힘을 준다고."
아내를 깨워 조용히 시키는 것도 모자라 구색 갖춘 음식까지 준비하라고 명령한 그는 이제 나라를 구하는 사람처럼 절절한 고통에 젖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글에 집중하려던 순간, 그의 귀를 괴롭히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그 소리는 옆방에서 하숙하고 있는 하숙생이 기도를 드리는 소리였다. 그는 기어코 하숙생에게도 버럭 화를 낸다.
"말하지 않았어!" 끄라스누힌이 고함을 지른다. "조용히 기도드릴 수 없겠어! 당신이 지금 글을 쓰는 걸 방해하고 있다고!"
"죄송합니다...." 포마 니꼴라예비치가 소심하게 대답한다.
"쉿!"
이 짧은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쉿, 하는 소리가 집 안 전체에 퍼진다.
"쉿!"
끄라스누힌과 처지가 다른 나는 감히 사람들에게 '쉿!'을 해 본 적은 없다. 대신 내가 알아서 조용한 시간, 조용한 공간을 찾아 글을 써야 한다. 다행히 우리 집은 대체로 조용하므로 글을 쓰는 데 꽤 안성맞춤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꿈을 꾼다. 너무나 조용해서 하루 종일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베길 곳으로 긴 여행을 가는 꿈. 아침부터 밤까지 내 귀엔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 들리고, 창문을 열면 바람 소리라든지, 새 소리라든지, 파도 소리라든지 하는 자연의 소리만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글이 잘 써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곳에서라면, 한 달만에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뚝딱 써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 그렇듯 조용한 곳에서라면 글을 쓰는 즐거움에 한껏 더 강렬하게 빠져들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