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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Jul 03. 2019

[드로잉 3일] 기린이 잠든 사이에

잡지 <우먼카인드> 2호를 읽으며 기린에 관해 알게 된 사실이 몇 개 있다. 기린은 물 없이도 몇 주를 버틸 수 있다고 한다. 각 발에는 발가락이 두개씩 있다. 기린이 내는 소리 인간은 결코 들을 수 없다.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음역으로 소리를 주고받기 때문이다. 기린은 하루종일 서 있다. 먹을 때도, 잘 때도, 새끼를 낳을 때도. 그리고 또,  기린은 하루에 잠을 20분밖에 안 잔다고 한다.  


서서 자는 것도 고역일 것 같은데 그것도 겨우 20분밖에  잔다니 얼마나 피곤할까, 아아 불쌍한 기린. 인간인 나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는데, 물론, 기린 입장에서는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서서 자지도 못할 뿐더러 하루에 8시간이 자야한다니 인간이란 얼마나 비효율적인 생명체인가, 나는 기린으로 태어나 어찌나 다행인지! 


내가 만약 기린으로 태어났고, 하필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유독 기린을 그리고 싶다면 그림 그리기가 훨씬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내내 서 있는 기린은 얼마나 그리기 쉬울까. 기껏해봤자 걸어다니거나 뛰기나 할 테고 가끔가다 긴 목을 움직이며(기린의 목은 1.8미터 정도라고 한다) 뭘 먹거나 할 뿐일텐데 말이다.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나는, 뒤늦게 하필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고, 유독 인간을 그리고 싶어해서 어려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인간은 눕거나 앉거나 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기린보다 그리기가 까다롭다. 거기에다가 나만해도 적어도 각기 다른 100가지 포즈로 앉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모든 포즈를 그릴 수 있어야 하니, 얼마나 까다로운가.


오늘 내가 그린 사람은 모두 서 있었다(기린 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린이 아니었기에 손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있기도 했고, 어깨에는 가방을 매고 있기도 했으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지하철 손잡이 두 개를 두 손으로 모아 잡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기도 했다. 반바지를 입은 한 남자 지하철에서 내리는 과감한 행동까지 했다. 오늘 내가 20분 동안 그린 그림은 총 여섯 개였다. 만약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꿀잠에 빠져든 기린이 있었다면 기린이 잠에 깰 땐 세상에 없던 그림 여섯 개가 생겼다는 뜻이다. 기린 입장에선 아무 상관 없는 일일 테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기린이 잠든 사이에 오늘 해야 할 일을 무사히 잘 마쳐 참 뿌듯하다. 그 그림들이 얼마나 엉망진창이었는지에 관해서는 기린 입장과 내 입장이 같기도 하다. 결과야 아무 상관 없다는 것. 지금 내게 중요한 건 하루에 20분 성실히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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