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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Jul 09. 2019

[드로잉 9일] 설거지와 그림

틱낫한 스님은 설거지를 할 땐 설거지만 하라고 했다. 아니, 그럼 누가 설거지를 하면서 머리를 감는다는 말인가, 하고 괜히 투정을 부리고도 싶지만, 사실 우리는 틱낫한 스님의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지 않는다. 설거지를 할 때 설거지만 한다는 건, 설거지를 끝마치고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내 모든 순간은 설거지, 너였다.


설거지를 하는 모든 순간에 설거지만 생각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지는 설거지를 해 본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우리는 설거지를 하면서도 늘 딴생각을 한다. 설거지에만 마음을 바치지 못한다. 설거지에만 집중하지 못한다. 설거지가 하기 싫다는 생각, 식기세척기를 사야겠다는 생각, 이따 저녁으로 뭘 먹을지 하는 생각, 아까 친구가 카톡을 왜 읽씹 했을까 하는 생각들이 우리 머리를 꽉 채우기 때문이다.


틱낫한 스님의 '설거지론'을 처음 접하고 나서 나는 이 '설거지론'이야말로 잘 사는 삶으로 가는 마스터키라는 생각을 했었다. 삶이란 시간의 총합이므로, 우리 삶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달라질 테니까. 틱낫한 스님의 '설거지론'을 생각하면 어떤 시간 동안 '무엇'을 하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무언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나의 지리멸렬한 인생을 개탄할 필요는 없다. 만약 내가 오늘 설거지를 할 때 설거지만 했다고 한다면, 나의 오늘 하루는 틱낫한 스님이 인정할 만큼 좋은 하루였을 테니까!


다 알고 있으면서도, 어떤 일을 할 때 매 순간 집중하기가 너무 어렵다. 그림을 그릴 땐 그림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자꾸 실패하고 있다. 손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머리로는 내일 점심엔 떡볶이를 먹을지 냉면을 먹을지, 오늘은 이 그림을 그리고 어떤 글을 쓸지 등등을 생각한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보면 주인공의 갸름한 얼굴 라인이 짱구처럼 돼 있다. 나는 짱구 얼굴이 너무 귀엽지만, 그렇더라도 이건 아니다. 나는 이제 만화 속 인물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짱구 같은 얼굴 라인에다 어렵사리 눈, 코, 입을 그려 넣는다. 그렇게 완성된 우리 주인공의 얼굴은 그냥, 짱구다.


이렇게 글로 반성하고 나면, 내일의 나는 조금 달라질까. 요즘 나는 점점 사라져 가는 집중력의 끝자락을 붙잡고 애걸복걸하며 살고 있는데, 과연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주인공의 갸름한 얼굴 라인을 포기할 순 없으니, 내일 하루라도 그림을 그리기 전 설거지를 해봐야겠다.  마치, 예행연습처럼. 설거지를 할 땐 설거지만 생각해야 하는 것처럼, 그림을 그릴 땐 그림만 생각해야 한다. 이 간단한 걸 잘하게 될 그날이 얼른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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