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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Jul 19. 2019

[드로잉 19일] 티모시 샬라메

잠시 자리를 비운 지인을 기다려야 하는데, 뭘 하면서 기다릴까. 나는 기다리는 일이 싫지만은 않다. 타인이 무례할 만큼 약속 시간에 무딘 사람이 아니라면, 언제든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려줄 수 있다. 대게는 책을 보며 기다린다. 요즘엔 인터넷에 한심할 정도로 중독된 상태니까 당연히 인터넷도 하며 기다린다. 오늘은 지인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가방에서 크로키 북을 꺼냈다. 그림을 그리며 기다려볼 셈으로.


만화책을 안 챙겨 왔으니 당장 뭘 그려야 할지 생각해내야 했다. 내 머릿속 그림 챕터에 다양한 이미지들이 한가득 들어 있다면 그 이미지 중 하나를 머리에 띄워놓고 그릴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내 머릿속 그림 챕터엔 아직 이미지가 하나도 없다. 할 수 없이 포털 사이트를 검색하며 이미지를 구하다 문득 영화 '미스 스티븐스'를 떠올렸다. 떠올린 이유는 하나다. 티모시 샬라메를 한번 그려볼까.


'미스 스티븐스'에서 한 장면을 그려보기로 했다. 티모시 샬라메가 연기한 빌리가 고개를 틀어 이 쪽(내 쪽)을 보고 있는 장면. 언젠간 이 배우의 모습을 똑같이 그려보고 싶다는 열망을 담아 고개를 푹 숙이고 그리기 시작했다. 먼저 얼굴을 어느 정도까지 비슷하게 그릴지 선택해야 했다. 눈, 코, 입을 만화스럽게(?) 표현하고 넘어갈까 아니면 (안 될 걸 알면서도) 실물과 비슷하게 그려볼까. 결국 중간 정도로 그려보기로 했다. 어차피 실물처럼은 그리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이나 입술 모양까지는 신경 써 보기로(신경 쓴다고 잘 그리게 되는 건 아니지만!).


고 고운 얼굴 선을 먼저 그렸다. 다음에는 크고 아름다운 눈. 이 눈을 보면 티모시는 정말 복 받은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눈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니까. 이보세요, 난 상처 받은 영혼이에요, 그러니 얼른 사랑해줘요. 그것뿐일까. 퇴폐미와 순수미가 동시에 살아 있는 눈빛이라니. 눈이 이렇게 열일을 하면 몸은 그냥 가만히 있어주기만 해도 될 텐데, 몸도 열일이다. 그의 몸은 아주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사람들의 눈을 끈다. 소년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몸. 보호본능을 자극하면서 섹시하다.


큰 눈에 짙은 쌍꺼풀을 그리고나서 코를 간략하게 그려 넣었다. 이어서 입술. 인중 아래에 입술 산을 그리고 입술 라인을 그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구분하기 위해 그 사이를 연필로 몇 번 왔다 갔다 했다. 이어 눈썹을 그렸다. 눈썹이 꽤 짙구나. 귀를 그리고 머리를 그리고 이젠 목부터 시작해 몸을 그렸다. 회색 티셔츠에 검은색 후드티를 입고 있다. 색은 표현할 길이 없다. 대신 어설프게 그림자를 군데군데 넣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얼굴에 그림자를 조금 넣어준다. 난 아직 그림자를 어느 정도 넣어줘야 하는지 모르므로 그냥 최소한으로 넣어준다는 생각으로 넣어줬다. 그림 완성.


어느새 돌아온 지인에게 내 그림을 보여줬다. 지인은 눈을 살짝 찌푸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내 그림을 자세히 뜯어본다. 그의 입술 끝에 물음표가 자물쇠처럼 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림 다. 나는 속으로 혹시 이 사람은 그 유명한 영화 '콜미 바이 유어 네임'도 안 봤나 의심해본다. 어쩌면 이 사람은 티모시 샬라메라는 이 유망한 세계적인 샛별의 얼굴을 모르는 게 분명하다고 확신도 해본다. 나는 묻는다. 혹시 티모시 샬라메를 아십니까. 그가 답한다. 압니다. 나는 말한다. 이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그가 한숨을 쉰다. 흐음. 나는 그의 눈을 본다. 그는 내 눈을 피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그림을 다시 보고 말한다. 이게 티모시 샬라메라고요?


언젠가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그려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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