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따라 그릴까 하다가 얼마 전에 언급했던 웹툰 <마음의 숙제>를 따라 그리기로 했다. 색감이 예쁜 만화라 과연 드로잉 연습에 적합할까 싶지만, 그래도 내용 역시 예쁘니 그림을 따라 그릴 때 마음이 좋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난 이 만화 속 옷들이 참 마음에 든다. 오버핏이다. 입으면 따뜻하고 편안할 것 같은 옷들.
첫 장면에서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고백을 한다. 둘 다 고딩이던 시절. 난 너 좋아하는데 넌 어때? 남자 주인공은 이 고백이 조금 뜬금없다. 우린 친하지도 않은데? 난 너랑 몇 마디 나눠보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남자 주인공은 쉽게 타인의 마음을 내치지는 않는 아이. 여자 주인공에게 말한다. 나한테 시간을 좀 줄래? 생각을 해볼게.
참고 참다 겨우 고백을 했는데 상대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다면 마음이 어떨까. 이 웹툰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아주 많이 좋아하게 된 애에게 고백을 했는데 그 애가 사라진 자리에서.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마음에 관한 이야기.
첫 그림으로 고백을 하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그렸다. 만화 같은(?) 표정이다. 눈을 표현하기가 쉽다. 일자로 죽 긋고 그 아래 동그라미를 그려 넣으면 눈 완성. 눈썹도 짧게 죽 긋는다. 코는 생략, 입은 네모. 이 네모 입만 보면 여자가 지금 목소리를 크게 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하다. 둘 다일 수도 있겠다. 울음 섞인 큰 목소리로 널 좋아한다고 외치고 있는 걸까.
두 번째 그림은 서로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을 옆에서 그린 그림이다. 여자는 이제 막 고백을 마친 후이고 남자는 아직 뭐라 말할지 정하지 못한 상태다.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이곤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올 말을 두려워하며 기다리고 있고, 남자는 지금 자기에게 벌어진 일이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멀뚱히 서 있다. 여자의 뺨에 빗금 세 개를 그었다. 발그레한 뺨이 말해주는 건, 여자가 지금 매우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
이 그림을 그리며 나도 그 시절을 떠올려봤다. 그 시절, 내가 고백했던가, 아니면 그 애가 고백해왔던가. 우리는 마주 보고 서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눈을 피하며 딴청을 하다가 또 정확히 같은 순간에 서로의 눈을 바라보곤 했었지. 그때 나는 그 애의 심장 소리를 들었고, 그 애도 아마 내 심장 소리를 들었을 텐데. 그때, 그 애가 내 고백을 받았던가, 아니면 내가 그 애의 고백을 받았던가. 아, 맞다. 나한텐 이런 기억이 없지! 나에겐 수련회를 같이 간 남자 사람 자체가 없었지!
이어진 그림들도 쭉쭉 그려나갔다. 만화 같은 표현들도 열심히 따라 그렸다. 어차피 나는 지금 보이는 것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훈련도 하고 있는 거니까, 그게 무엇이든 잘 따라 그리기만 하면 모든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의 여자 주인공은 테이블에 팔을 올려놓고 대화를 하고, 맥주를 마시고, 턱에 손을 괴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 나는 그녀에게 더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 주세요(그림 연습 재미있게 할 수 있게요), 하고 속으로 속삭이며 그녀의 뻗친 머리를 그렸다. 이제 여자 주인공은 서른 살이 됐다. 13년 전, 좋아했던 아이에게 고백했다가 차인 기억을 품고서. 왠지, 나도 이런 기억 하나쯤 품고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 그림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