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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디 Sep 07. 2022

디지털 프로덕트를 만들며 깨달은 11가지 사실

꼼수 없음, 완벽 없음, 공식 없음

재직 중인 회사의 앱 출시가 코 앞으로 다가오며 실무자들과 밀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문득 디지털 프로덕트를 지금까지 꽤 오래 만들며 깨달은 사실들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소개하고 싶은 11가지 이야기들은 프로덕트를 만들 때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것들이다. 글의 특성상 뇌피셜이 많으니 업계 동료가 하는 개인적인 이야기쯤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1)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면 망한다.

기획부터 출시까지 사용자에 대한 고려가 완전히 빠진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특히 IT를 베이스로 하는 스타트업은 많은 경우 대표나 공동 창업자들이 가진 기술력이나 아이디어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업계에 있으면서 자주 봐온 모습이 있다. "우리의 이런 기술(아이디어)을 분명 사람들이 좋아할 거야"라는 막연한 믿음이다. 이런 경우 높은 확률로 서비스나 프로덕트가 실패했다. 반면 가지고 있는 기술력이 없더라도 시장에서 문제를 발견해 디지털 프로덕트로 연결할 때 성공한 경우를 더 많이 봤다. 그렇게 발견한 문제들은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았다. 과거 제작에 참여한 '베이비 스토리'라는 앱은 미국에서 엄마들이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기록하기 위해 수작업으로 환경을 꾸미는 문화에서 출발했다. 미국은 특히 기념일이 많은 걸로 유명한데 그때마다 소품 구입비, 디자인 구상, 엄마의 노동력 등은 어려움일 수 있다. 구매한 소품들의 처리 문제가 발생하고, 결국에는 사진 한 장으로 남는 것 역시 아쉬움일 수 있다. 베이비 스토리는 이 부분을 디지털로 옮겨와 그래픽 소스를 앱으로 제공해 엄마들이 쉽게 꾸밀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아이와 엄마의 추억이 자동으로 앱에 아카이빙 되는 건 디지털의 힘이었다. 앱은 미국 시장에서 적지 않은 성공을 거뒀다.

출처: (왼) Lauren Bowyer, (우) Baby Story @pixo


또한, 가설 수립 단계부터 적극적으로 예비 사용자를 발굴해 인터뷰를 진행하는 경우 역시 성공확률이 높았다. 프로덕트 출시 전 예비 사용자들에게 받는 극초기 피드백은 출시 후에 받는 피드백보다 몇 배 높은 가치를 가진다. 만들지 않아도 될 기능에 대한 우선순위를 낮추는 것만으로도 큰 개발비용과 그보다 더 중요한 시간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2) 결핍은 사실 디폴트다.

생각해보면 커리어 초기부터 지금까지 모든 게 풍족했던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가장 중요한 시간, 인력 수, 마케팅 비용 등이 여기 포함된다. 커리어 초기에는 항상 이런 환경을 탓했던 것 같다. 왜 우리 회사는 항상 사람이 없어서 내가 야근을 하게 될까. 마케팅 비용만 풍족했어도 제품이 성공했을 텐데. 그런데 조금 더 나아 보이는 회사로 이직해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음에도, 또 다음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항상 환경은 결핍으로 가득했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한다. 러시아 상류층인 안나와 브론스키의 치정을 다룬 내용이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나름으로 불행하다.”

이 첫 문장에 정답은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가정의 불행은 굉장히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가족 중 누군가 무척 아프거나, 가족 간 사이가 안 좋거나,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거나, 가정폭력이 일어나거나 하는 식이다. 이 중 하나라도 발생한다면 행복감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반면 '행복하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저런 다양한 요소들에서 두루 문제가 없어야 한다. 때문에 행복은 디폴트가 아닌 잠시 유지되는 '상태'에 가깝다. 이점이 행복한 가정들이 닮은 이유가 아닐까?

사실 막 엄청 재미있지는 않다.

회사로 바꿔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연차에 비해 나쁘지 않은 연봉, 하는 일에서 느끼는 보람의 크기, 좋은 동료, 쾌적한 오피스. 이 모든 게 두루 괜찮을 경우 행복에 가까워진다. 그런데 현실은 저 모든 게 만족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저마다의 불행 요소를 한 두 개쯤 꼭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연봉은 좋은데 상사가 너무 마음에 안 들거나, 일이 너무 시시하거나 하는 것들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부족함을 디폴트로 받아들이니 마음이 편해졌다. 누군가 비관주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삶의 만족도는 훨씬 높다. 가끔 오는 행복의 상태에 감사함을 느끼며 살고 있다.


3) 꼼수에 기대지 않는다.

커리어 초기에는 내가 만드는 프로덕트에 지름길이 있다고 믿었다. 사용자를 빨리 모으기 위해 어그로성 광고를 만들기도 했고, 사용자에게 피해가 갈 수 있는 다크 패턴을 기획하기도 했다. 이런 작업을 통해 단발적으로 트래픽이 늘었던 경우도 많다. 그런데 정작 프로덕트가 제대로 된 가치를 제공해주지 않거나 기능의 완성도가 너무 떨어지면 사용자는 참지 못하고 빠르게 이탈했다. 결국 중요한 건 트래픽의 양이 아니라 남은 사용자의 비율이다.


4) 마케팅이 프로덕트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3번과 이어지는 내용이다. 가끔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덕트 실패를 마케팅 때문이라고 말하는 업계 동료들을 만난다. 우리는 잘했는데 마케팅팀이 잘 못해서 실패했다는 식이다. 마케팅은 분명 프로덕트를 성장시키는 강한 원동력이다. 더불어 프로덕트 마켓 핏을 찾은 이후 단계에서 마케팅을 제대로 못하면 큰 스케일업은 힘들 수 있다. 그럼에도 마케팅이 프로덕트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다음은 CB INSIGHTS에서 진행한 스타트업이 망하는 20가지 이유에 대한 설문 결과다.

출처: CB INSIGHTS

실패의 가장  이유는 '마켓에서의 니즈 없음' 차지했다. 무려 42% 해당하는 높은 수치다. 2위인 자본 문제도 사실 1위와 관계가 . 반면 마케팅 문제는 8위로 집계됐고 전체의 14% 불과하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대로 만드는 것이다.


5) 생각보다 디자인도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나는 커리어의 90%를 디자이너로 보냈다. 하지만 당시에도 디자인 만능 주의를 표방하는 디자이너들을 보면 숨이 턱턱 막혔다. 디자인은 분명 좋은 가치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초기 스타트업의 경우 전달해야 하는 메시지나 가치가 비교적 명확하다. 그런데 어설픈 디자인에 가려 정작 전달해야 하는 메시지는 뒷전인 경우를 종종 본다. 초기 스타트업인 경우 기업의 가치나 메시지에 딱 맞는 조형언어를 골라 적절히 디자인할 수 있는 수준 높은 디자이너와 함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장식 요소를 화면에서 모두 빼고 가독성 높은 폰트로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사실 더 낫다. 아직 사용자가 프로덕트를 사용할 뾰족한 이유를 발견 못했다면 그 외의 것은 두 번째 문제다. 특히 화면의 불필요한 디자인 요소는 사용성 저하는 물론, 고스란히 개발 비용으로 돌아가니 주의해야 한다.


6) 성공한 공식이나 프레임워크를 의심한다.

다른 회사에서 성공한 프레임워크로 일을 진행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물론 프레임워크는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수단이다. 그럼에도 이를 비판 없이 사용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프레임워크가 성공한 회사마다의 고유한 환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별적인 맥락은 무시된 채 저기서 성공했으니 우리도 성공하겠지라고 그대로 프레임워크를 받아들일 경우 힘든 상황이 발생한다.

구글과 우리는 다르다는 마음가짐으로 첫 장을 가볍게 펼치자.

특히 작년까지 스타트업에서 무척 유행했던 존 도어의 'OKR'이라는 개념이 있다. OKR은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목표로 정하는 'Objectives', 달성되었는지 판단하는 핵심 결과 'Key Results'의 약자다. 그런데 수직적인 조직 구조는 방치한 채 OKR의 외형만 도입해 핵심 결과를 일종의 감시 수단으로 삼는 곳들을 매우 많이 보았다. “가슴 뛰는 목표를 설정하고 자율적으로 실행하도록 조직이 돕는다”라는 OKR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빠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애플이 아니고 구글도 아니다. 다른 환경에서 성공한 프레임워크를 각자 맞는 방식으로 안착시키는 것은 또 다른 창작의 영역에 가깝다.


7) 처음부터 완벽을 지향하면 모두 지친다.

스타트업에 있다 보면 가끔 장인을 만난다. 물론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디테일을 극한까지 추구하려는 모습은 존중한다. 그런데 우리가 속한 조직은 대부분 어떤 단계에 속해있다. 프로덕트 마켓 핏을 찾은 뒤 안정세에 접어든 곳이 있는 반면, 아직은 불안한 상태에서 무수히 많은 가설을 검증해야 하는 조직도 존재한다. 만약 후자라면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위해 디테일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그리고 한 부분에 너무 몰두하다 보면 대상에 애착이 생기기 때문에 스스로 객관적인 평가를 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 더불어 타인의 피드백에 대해서도 방어적으로 변하기 쉽다.


8) 좋은 팀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가끔 좋은 팀을 만날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팀은 구성원들의 학벌이 좋거나 유명세가 있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팀이 노력과 시간을 들여 어떤 결정을 했어도 구성원 중 누군가 해당 결정을 뒤엎는 좋은 논리나 근거를 가지고 왔을 때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나는 이러한 능력을 '협업 지능'이 높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협업 지능이 높은 팀이 많이 없다. 첫 번째는 결정된 사항 자체가 일이 많이 진척되었다는 착시를 주기 때문이다. 이를 뒤엎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은 팀에 큰 손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잘못된 방향은 시간뿐 아니라 종국에는 어떤 게 문제였는지 모두 망각하게 되는 상황까지 발생시킨다. 두 번째가 사실 더 어려운데, 팀의 누군가 방향이 잘못됐다고 생각해도 근거를 마련해 말로 내뱉기 까지는 큰 결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협업 지능을 높이기 위해서는 조금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도 비난당하지 않을 수 있는 팀 내 심리적 안전감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무실이 예뻐서 퍼온 이미지 @unsplash

나는 좋은 팀이 프로덕트보다 더 중요한 경우를 목격한 적이 있다. 이 팀은 협업 지능이 무척 높았다(팀 A라고 부르자). 당시 팀 A가 진행하던 프로덕트가 마켓 핏을 못 찾고 망한 적이 있다. 그런데 팀은 와해되지 않았고 구성원 그대로 새로운 프로덕트를 준비해 1년 만에 30% 가까운 리텐션을 만들어냈다. 협업 지능이 높은 팀은 '회고 능력'도 뛰어나기 때문에 회사에서 보장만 해준다면 실패하더라도 계속해서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다.


9) 외부 개입이 잦은 순간 망한다.

회사는 다양한 관계로 형성된다. 대표적으로 투자자나 클라이언트, 외부 자문(?), 전문가 그룹 등이 여기 속한다. 물론 이들은 아주 가끔 훌륭한 의견을 주지만 대체로 프로덕트의 주요 사용자가 아닌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들이 주는 의견이 사용자나 실무자보다 더 특별한 위계를 가질 때 발생한다. 현재 이러한 외부 개입 없이 실무자의 의견과 사용자 중심으로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조직은 다닐만한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생각보다 이 당연한 사실이 보장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미 안 좋은 방향으로 일하는 문화가 고착화됐다면 개인이 바꾸기란 무척 어렵다. 가끔은 도망치는 것도 정답이다.


10) 0.001%라도 어제보다 나은 프로덕트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꼼수에 기대지 않는다'와 연결되는 내용이다. 나는 문장이 단순할수록 명제에 가까워진다고 믿는다. 다음은 프로덕트 제작 시 가장 명제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문장이다.

"사용자에게 가치 있는 것을 만든다."

생각해보면 디지털 프로덕트를 더 좋게 발전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를 명확히 파악해 매일매일 조금씩 고쳐 나간다면 언젠가는 좋은 제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사에는 수많은 변수가 도사린다. 앞서 말한 외부 개입부터 시작해, 부서별 정치, 팀 내 갈등, 불안한 리더십. 어렵겠지만 이런 것들에 현혹되지 않고 어제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나은 프로덕트를 만드는데 집중하면 된다.


11) 모든 게 완벽해도 성공은 별개의 문제다.

모든 요소들이 완벽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 과거에 나는 무척 좋은 팀에 속해 본 적이 있다. 외부 개입이 없고 시간과 자본도 넉넉했고, 프로덕트 방향성과 초기 사용자 피드백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프로덕트가 출시되자 완벽히 실패했다. 사실 아직까지 실패의 원인을 잘 모르겠다. 당시 함께 했던 동료들도 하나같이 패닉 상태에 빠졌고, 대표나 주변 관계자들도 비슷한 상태였다.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 어떤 것을 만들 때 상황이 좋은 것과 그것이 성공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성공을 만드는 엄청나게 큰 요소는 “운”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생각은 역설적으로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힘을 만들어준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운 때문에 낙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내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운을 기다리면 된다.


지금까지 꽤 오랜 기간 디지털 프로덕트를 만들며 가진 생각들을 써보았다. 뇌피셜이 많아 부끄럽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칠까 한다.


'디지털 프로덕트를 만들며 깨달은 11가지 사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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