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빅! 슬립 테크 프로덕트 오너로 환승합니다!
약 4개월 전만 해도 디자이너로 하루를 살았다. 피그마나 프레이머를 사용해 직접 컬러를 관리하고 컴포넌트를 디자인했다. 디자인 관련 글을 썼고, 만나는 지인들도 대체로 디자이너들이었다. 방송에 출연해 디자이너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고, 어렵사리 한 권의 디자인 책도 냈다. 디자이너로 불리는 게 익숙하고 편했다. 책상 위 작고 동그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디자인을 막 시작하던 시기에 꿈꿨던 청사진에 어설프게 닮아있었다. 미디어에 몇 번 노출되다 보면 내가 뭐라도 되는 것 같고 또 중독적이다. 문득 나는 지금도 더 성장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러한 감정이 든 이후부터 취지에 공감가지 않는 강연이나 방송 제의는 모두 거절했다. 내면의 빈곤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골방에 틀어 박혀 강박적으로 책만 뒤지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다 운이 닿아 슬립 테크 기업 에이슬립에서 프로덕트 오너로 제안을 받았다. 나는 에이슬립이 다루는 수면과 테크라는 주제에 큰 매력을 느꼈다. 심리나 건강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수면 앱 특성상, 인간 중심의 사용자 경험을 제대로 설계할 수 있겠다는 확신도 들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10년간 나를 지켜준 디자인이라는 아늑한 둥지를 떠나고 싶은 모험심도 조금은 있었다.
현재까지 약 4개월간 새로운 환경에서 프로덕트 오너 역할을 맡아 어찌어찌 지내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현재 프로덕트 오너는 아니지만 커리어 로드맵에 프로덕트 오너를 바라보는 분들이 분명 있을 거라 생각한다. 디자이너에서 프로덕트 오너로 직무를 변경한 지 얼마 안 된 지금 시점에서만 전할 수 있는 감정과 사실에 집중하며 글을 썼다. 참고로 해당 글은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으며 주관적인 생각이 많음을 미리 밝힌다.
뭐부터 해야 하지? 프로덕트 오너로 출근한 첫날 가장 먼저 한 생각이다. 입사 전 미리 노션에 기록해 놓은 [입사 첫날 액션 플랜ㅋ] 같은 것들이 있긴 했는데, 막상 빠르게 돌아가는 회사를 보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고민하다 그냥 "사람들과 대화부터 하자"라고 결정했다. 이후 회사 사정에 밝은 분께 내가 먼저 대화하면 좋을 사람들과 간략한 이유를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에이슬립에 재직 중인 다양한 사람들에게 1on1을 먼저 신청했다(내 낯이 그 정도로 두꺼운 줄 몰랐다). 보통 디자이너로 새로운 회사에 입사했을 경우 팀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지는 않았다. 업무 관련성이 적은 사람들과는 자연스레 가까워지겠지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프로덕트 오너가 되니 입장이 매우 달라졌다. 내가 리드하게 될 앱스쿼드는 회사 내 진행되는 거의 모든 비즈니스와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약 한 달 반 동안 서른 명 가까운 에이슬립 사람들과 30분씩 1:1 대화를 했다. 구글 캘린더를 켜서 내가 아닌 상대의 시간을 고려해 스케줄을 짜는 것에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이야기할 주제를 미리 공유하지 않고 만났다가 30분을 어색하게 보내 무척 죄송했던 경우도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 둘이 만나 30분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난이도가 있는 일이라는 걸 몰랐다. 이후 나는 대화할 사람에게 궁금한 질문들을 몇 시간 전 미리 전달했다. 그리고 질문 하나하나를 밟아가며 서로를 조심히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장소는 주로 회사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카페나 옥상에서 이루어졌다. 개인적으로는 첫 만남이어서 그런지 옥상에서 함께 한 곳을 응시하며 이야기할 때가 카페에서 눈을 마주치며 대화할 때보다 대화의 감도가 더 좋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대화한 사람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과 전쟁 중이었다. 사운드를 기반으로 수면 단계를 분석하는 알고리즘과 시름하는 인공지능 팀, B2B와 B2C사이에서 비언어적 맥락을 고민하는 브랜드 팀, 글로벌 거대 기업과의 관계에서 실마리를 찾고 있는 글로벌 팀, 자율과 규칙 사이에서 균형을 찾고 있는 피플 앤 컬처팀 등. 모두 자신의 일에 고민이 많고 큰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다.
과거 디자이너로 회사에 재직했을 때는 사실 잘 몰랐다. 내가 소속된 팀의 일만 잘하면 됐으니까. 하지만 프로덕트 오너가 돼보니 다이아몬드의 수많은 면들 위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고민이 춤추는 공간이 곧 회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떨어진 면과 면 사이 반짝이는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것 또한 내 몫이 될 수 있음을 대화 중 누군가가 알려주기도 했다.
앞에 [프로덕트]가 붙은 직업들은 대체로 혼란을 부르는 것 같다. 한때 커뮤니티에서 프로덕트 디자이너의 역할이 어디까지 인지가 논쟁이었다. 프로덕트 오너 역시 이름이 주는 모호함이 존재한다. 감히 개인이 프로덕트의 주인이라고?
프로덕트 오너라는 직책의 R&R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인스파이어드, 쿠팡의 PO가 쓴 프로덕트 오너, 미디엄의 해외 아티클 등을 열심히 읽었다. 하지만 실리콘 밸리에서 사용되는 날 것 그대로의 개념이거나, 특정 회사 구조에 맞춰져 있거나, 이론적인 내용들이 많아 막상 적용할 수 있는 것이 별로 되지 않았다. 현업의 PO분들께 자문을 구해도 저마다 처한 환경과 세부적인 R&R이 조금씩 달랐다. 그러다 기획계의 아이돌 도그냥님의 역작 'K-Product Owner'의 탄생론을 만나게 된다(도그냥님 여러 사람 살린 듯).
이 글을 읽으며 나도 K-Product Owner의 위상학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음을 인지했고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다음은 도그냥님 글에 등장하는 유사 프로덕트 오너가 되기 싫은 마음에 정의해본 10가지 원칙들이다(실제 프로덕트가 나오기 전이고 유저가 없는 상태이며, 시작 전부터 10명이 넘는 서로 다른 전문가들이 모인 특수성이 있음).
1. 워터폴이 아닌 애자일 조직을 계속 지향하고 또 의식한다.
2. 기획을 어떤 팀이 전담하는 개념을 없앤다. 아이디어 초기부터 feasibility risk를 체크한다.
3. 개발팀과 디자인팀이 함께 모여 유저 스토리를 만든다(스토리 보드란 없다). 그리고 이 기능이 만들어져야 하는 목적을 충분히 공감하는 시간을 가진다. 목적이 공감가지 않는 유저 스토리는 프로덕트 백로그에 들어갈 수 없다.
4. 프로덕트 백로그의 우선순위를 팀과 논의해 조정하는 시간을 가진다. 노력 대비 임팩트가 큰 일들의 우선순위를 높인다.
5. 스프린트 플래닝과 회고 시스템을 체계화해 한 스프린트의 시작과 끝을 팀원들이 명시적으로 느끼게 한다.
6. 프로덕트의 3~5년 치 목표인 프로덕트 비전, 1년 치 목표인 로드맵, 분기별 이니셔티브를 팀원들과 함께 정의하고 공감한다. 그리고 이 사항들을 독단적으로 변경하지 않는다.
7. 프로덕트 제작에 도움이 될만한 지식은 끝없이 팀원들에게 알린다.
8. 서로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 수 있는 투명한 공유 문화를 지향한다. 데일리 스탠드업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매일 공유하고 해결책을 팀에서 함께 찾는다.
9. 서로가 서로의 시간을 아끼는 스쿼드 문화를 만든다. 미리 생각을 충분히 하고 미팅에 참석하며, 사전에 발제자가 미팅 노트를 공유한다.
10. 프로덕트 오너라는 것이 딱히 권한은 없는데 책임은 거대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제일 어려움).
사실 수면이라는 영역은 나에게 너무 생소했다. 잠의 경계에 해당하는 N1 수면, 얕은 수면 단계인 N2 수면, 깊은 수면 단계인 N3 수면, 가장 깬 것에 가깝고 꿈을 많이 꾸는 단계인 REM 수면 같은 용어들이 외계어처럼 다가와 나를 괴롭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던 중 [불면증을 위한 인지행동치료]라는 책을 만나게 됐다. 책에는 수면과 관련된 용어는 물론 실제로 불면증을 겪는 다양한 사람들의 상태와 기록들이 나와있었다. 책을 읽으며 수면 문제라는 것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나타날 수 있고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예측하기도 힘든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거 프로덕트 디자이너 신분으로 EBS 프로그램에 나가 UX 관련 이야기를 한 경험이 있다. 당시 나는 UX 디자이너와 프로덕트 디자이너의 가장 큰 차이를 도메인에 관한 접근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컨설팅 회사에서 UX 디자이너로 일할 때의 지식은 주로 도메인보다는 브랜드 자체가 중심이었다. 그리고 UX 전문성을 각 브랜드에 맞게 셀링 하는 역할이 강했다. 반면 스타트업은 여행, e-Book, 식재료, 금융, 블록체인 그리고 현재 내가 속한 수면처럼 특정 도메인에 소속될 가능성이 높다. 좋은 사용자 경험을 만들기 위해서는 준전문가 수준의 도메인 깊이와 그 영역에서 사용자들이 겪고 있는 '실제' 문제를 찾아 공감하는 것이 필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가진 지식을 팀에 최대한 나눠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스쿼드에는 이번 회사가 처음인 사람도 있고, 10년이 넘은 베테랑도 존재했다. 프로덕트를 만드는 데 있어 지식의 수준이나 결이 너무 달랐다.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의 공감대가 필요했다.
우리 팀은 정기 미팅 시작 전 10분 정도의 미니 세션을 마련해 각자 알고 있는 지식을 알기 쉬운 언어로 전달하는 시간을 가졌다. 개인적으로는 스쿼드의 막내이자 iOS 개발자인 매튜가 준비한 정보 약자를 위한 접근성 세션이 무척 기억에 남는다. 접근성에 관해 나름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개발자가 이야기하는 접근성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신선한 것이었다. 다음은 내가 현재까지 진행한 미니 세션의 주제들이다.
뷰저블 히트맵을 통한 데이터 분석 기초
데이터 드리븐 UX에 대한 기초 이론
PMF와 MVP에 대한 이해
유저 스토리와 인수조건(AC)이 필요한 이유
린 고객 개발과 초기 지지자 찾기
프로덕트 디자이너를 위한 기초 API
스쿼드, 애자일, 칸반 이해하기
세션 끝에는 해당 주제에 관해 너나 할 것 없이 자유롭게 토론하는 시간을 꼭 가졌다. 본격적으로 개발이 진행되기 전 서로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됐으리라 믿는다. 사실 이런 시간은 회사가 배려해주지 않으면 가지기 힘들다. 지금도 대표님과 회사에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다.
나는 퍼소나라는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특히 오피스 내부에서 데스크 리서치를 통해 매끈히 모델링 된 퍼소나는 변화하는 시장의 니즈를 빠르게 반영하기 힘들다. 현실에는 복잡한 니즈를 가진 구체적 개인들의 집합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사람이니 매일매일 변화한다. 때문에 현재 우리 팀이 만들고 있는 초기 제품의 경우 거창한 시장조사나 분석 보고서는 오히려 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소수라도 실제로 우리가 만들고 있는 제품이 세상에 나왔을 때 자신의 삶 속 문제가 해결될 사람을 찾아야 한다. 이런 사람들을 린 고객 개발 방법론에서는 제품의 초기 지지자(earlyvangelist)라고 부른다.
린 고객 개발의 저자 신디 앨버레즈는 이러한 초기 지지자와의 한 시간 대화가 10, 20시간의 개발 시간을 아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흔히 개발 함정이라고 부르는 아무도 쓰지 않을 기능을 열심히 디자인하거나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코드 제작 시간을 아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앱이 완성되기 전부터 우리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지지하는 실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이러한 생각은 사실 조바심에 가까웠다. 자신의 수면 상태를 디지털 솔루션으로 측정하는 사람을 주위에서 거의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기술 수용 주기에서 혁신 수용자와 선각 수용자까지로 선을 긋고 IT에 종사하는 지인들이 많은 페이스북과 링크드인에 똑같은 내용으로 초기 지지자를 찾는 포스팅을 해보았다. 결과는 놀랍게도 친구가 훨씬 많은 페이스북보다 링크드인에서 먼저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운이 좋게 앱의 초기 지지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며칠에 걸쳐 약 스무 명 가까이 인터뷰할 수 있었다. 대부분 애플 워치나 슬립 사이클, 오토 슬립, 오라링 같은 솔루션을 통해 실제로 자신의 수면을 측정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IT에 종사하며 대부분 혁신 수용자와 선각 수용자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사용했던 솔루션에서 아쉬운 점과 개선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더불어 에이슬립에서 만들고자 하는 프로덕트가 세상에 빨리 나오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나는 초기 지지자들과 계속 좋은 관계를 이어나갈 예정이다.
현재 내가 속한 앱스쿼드는 올해를 목표로 프로덕트의 MVP를 제작 중이다. 더 구체적이고 생생한 과정들은 스쿼드 멤버들이 직접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다음 주에 출근하자마자 아래 링크를 스쿼드 동료들에게 보낼 예정이다. 해당 설문에는 나 스스로 프로덕트 오너로써 개선하고 싶은 부분들에 대해 솔직한 피드백을 동료들에게 받을 수 있는 질문들이 담겨있다. 프로덕트 오너 특성상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컴퍼트 존(comfort zone)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주기적인 피어 리뷰 만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무섭지만!). 그리고 피어 리뷰 주기는 최대한 짧게 배치할 생각이다.
지금까지 부족한 점이 많은 4개월간의 프로덕트 오너 환승 회고였다.
'어쩌다 프로덕트 오너'(끝)
현재 에이슬립에서는 다음 세 직군의 뛰어난 동료들을 찾고 있습니다!
프로덕트 디자이너
그로스 마케터
웹 프론트엔드 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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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슬립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