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디 Jan 03. 2020

시계 다이얼 속 시각언어

가끔 잘 만들어진 시계 다이얼을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때가 있다. 이런 경우 다이얼의 시각적 균형감이 세세하게 고려된 경우가 많다. 그런 시계를 발견하면 시간을 보는 게 아니라 한 편의 명화를 감상하는 느낌이 든다. 스마트워치의 도약으로 점차 기계식 시계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이 느껴지는 요즘이다. 애플 워치 하나가 스위스 시계 산업 전반을 위기로 몰아넣는 것을 보며, 얼마 안 가 기계식 시계가 엘피처럼 취향으로 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기계식 다이얼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것은 조형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시각 디자이너의 특권이랄까. 시대적으로 아이코닉한 다이얼들을 조형원리에 대입시켜보며 그 가치를 상기시켜 보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다.




달의 움직임을 새겨 넣은 우아함, 예거 르쿨트르 울트라 씬 문페이즈

로렉스 위에 있다는 천상계 브랜드 예거 르쿨트르 문페이즈 모델은, 시계를 오브제라고 부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처럼 느껴진다. 이 모델의 가장 큰 특징은 다이얼 하단에 위치한 문 페이즈 디자인이다. 달의 위상이라는 뜻으로, Lunar phase라고도 한다. 문페이즈가 장착된 시계는 17세기부터 장착되기 시작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당시에는 주로 항해 시 밀물 썰물의 계산 등의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순수 태음력을 사용하는 이슬람권에서는 달력을 표시하는 기능도 수행했다.

<문 페이즈 - 나무 위키 발췌>


달의 궤적을 쫓는 우아함


달이라는 콘셉트를 가장 처음 느낄 수 있는 부분은 다이얼 질감이다. 차가운 은색 표면 위로 인덱스가 양각으로 튀어나와있다. 옆에서 시계를 본다면 핸즈(시/분/초침)가 차례로 지면에서 이격되 그림자를 가지고 있고, 인덱스는 양각으로 표현된다. 평면과 양각, 그림자라는 세 가지 높이감을 모두 품고 있는 셈이다. 마치 달 위에 비친 다른 행성의 그림자 같은 생각도 든다.

    관습적 다이얼 문법과 달리 12/3/6/9시 인덱스가 오히려 더 짧게 디자인되었다. 12시 인덱스는 두 개로 분리돼 시각적 구두점 역할을 한다. 문페이즈는 세 겹의 깊이감을 가졌으며 서서히 깊어져 간다. 문페이즈의 깊이감은 다이얼에 강한 Z 축을 발생시켜, 핸즈의 그림자부터 인덱스의 양각을 지나 신비로운 원근감을 만들어 낸다.


달의 위상에 따라 달라지는 플렉서블한 영역


    문페이즈는 다이얼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하며, 달에 따라 형태가 변하는 동적 공간이기도 하다. 달과 시침 컬러는 동일한 저채도의 블루를 사용해 차가운 우아함을 표현한다. 자칫 비어 보일 수 있는 문페이즈 하단 여백 부분에 대문자 'AUTOMATIQUE'를 한 줄로 작게 타이포그래피 해 시각적 긴장감을 부여했다. 상단 예거 르쿨트르 로고는 별도 줄 바꿈 없이 디자인돼 실눈을 뜨고 보면 한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이로 인해 하단 AUTOMATIQUE와 시각적 리듬감이 발생한다.

    문페이즈 영역 날짜 테두리에는 짝수가 삭제되고, 그 자리에 온점이 배치됐다. 31에서 1로 넘어가는 중간에 온점을 넣으면 시각적 논리가 무너지기 때문에 간격을 과감히 붙여 버렸다. 모든 것이 정밀하게 짜인 기하학적 지면에서, 자칫 실수처럼 느껴지는 이 작은 부분 때문에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생겨나는 것 같다. 아래 그림은 애플 워치의 문페이즈 기능이다. 기계식 다이얼이 만들어내는 우아한 문페이즈와 다른 매력이 있다. 조금 더 데이터 중심이며 실사에 가깝게 달이 디자인되었다. 기술적 변화에 맞춰 데이터가 변주되는 흥미로운 양상이라고 생각된다.


애플 와치의 문페이즈. 기술적 변화에 맞춰 데이터가 변주되는 흥미로운 양상


* 만약 문페이즈 시계를 가지고 있다면 아래 파텍필립 상세페이지 하단 날짜 계산기를 통해 달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patek.com/en/collection/complications/5146G-001




최초로 달에 간 시계, 오메가 스피드마스터

1963년, NASA는 우주 비행사들이 달에서 쓸 시계를 찾고 있었다. 정확한 용도는 밝히지 않은 채 열 군데 시계 브랜드에 연락했고, 그중 롤렉스, 오메가, 론진만이 NASA가 요구하는 기계적 사양에 맞는 후보를 제출했다. NASA의 혹독한 열 가지 테스트를 모두 통과하고 채택된 것은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뿐이었고, 결국 1969년 아폴로 11호를 통해 인류 최초로 달에 간 ‘문 워치’가 된다.

<IMBOLDN '영화 속 시계들에 얽힌 이야기' 발췌>


최초로 달에 간 시계, 스피드 마스터


오메가사의 스피드마스터는 일명 '문 워치'로 불리며 시계가 가질 수 있는 스토리텔링의 정점으로 여겨진다. 문 워치는 기본적으로 '크로노 그래프'로 분류된다. 크로노 그래프란 기본적으로 스톱워치 기능이 있으며, 극도로 미세한 시간(1초 미만의 시간) 측정이 가능하다. 다이얼 위에 존재하는 작은 원 세 개로 각각 '30분 카운터', '12시간 카운터', '스몰 세컨즈 서브 카운터'를 측정할 수 있다.

    문 워치는 크로노 그래프 특성상 무수히 많은 스케일(눈금) 덕분에 '기계적’이고 '미래적'인 톤 앤 매너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하나의 블랙이 아니라 베젤(시계 외관에 올려진 둥근 원 형태의 유리)에서 중앙으로 진입할수록 점차 명도가 높아지는 배색을 선택했다. 이는 외곽 베젤과 중앙 카운터 세 개의 기능을 시각적으로 분리해주는 역할을 한다. 아마 같은 블랙톤을 사용했다면 대비가 너무 강해 가독성이 떨어졌을 거라 예상된다. 중앙 세 카운터의 시각적 균형이 흥미로운데 작은 원 하나의 지름이 다이얼 원 지름의(밝은 블랙) 정확히 삼분의 일에 해당한다.

    

영화 '퍼스트 맨'에 나온 문 워치


상단은 오메가 심벌과(이미지형) 텍스트 타입 로고, 제품명과 라인이 총 4줄로 타이포 그래피 되어있다. 행간이 거의 붙을 정도로 촘촘히 디자인됐지만, 제품명을 핸드 스크립트 서체로 디자인해 시각적 분절에 성공했다. 오메가 로고 상단에 존재하는 12시 인덱스는 작은 원 두 개를 양 옆으로 배치해 문 워치 만의 시각적 특색을 만드는데 일조했다. 작은 원하나의 지름은 카운터 중앙에 위치한 원보다 의도적으로 약간 작게 디자인되었다.

    현재 예시 그림에서 문 워치의 핸즈는 10시 8분에 위치한다.(시계 초/분/침의 길이를 고려하면 저 시간대 정도가 가장 시각적 밸런스가 잘 맞는 시간이라고 한다. 백화점 쇼윈도의 멈춰진 시계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저 시간일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다이얼 위 핸즈가 모두 아래로 향하는 시간대쯤에는(예를 들어 7시 23분이라고 할 때) 심벌 로고 양 옆으로 여백이 많이 생겨 상대적으로 휑해 보이는 시각적 경향성이 발생하기도 한다.(하지만 대부분 이 시간대 다이얼은 못생겨 보이기 마련이다.)

 



아마 현재 가장 유명한 시계, 로렉스 서브마리너

명품 시계의 대명사로 알려진 로렉스 서브마리너는 사실, 거친 다이버 세계를 위한 툴 워치(작업용 시계)로 제작되었다. 다이버 시계의 아이콘이며 무수히 많은 카피캣이 존재한다. 개인적으로는 인류가 남긴 디자인 가운데 마스터피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시계, 로렉스 서브마리너


로렉스라는 왕관에 덧씌워진 브랜드 명성을 잠시 삭제해보자.(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조형적 산물로서의 다이얼과 베젤을 감상해보고자 한다. 서브마리너를 무심코 바라보면 제일 처음 시선이 찍히는 곳은 12시 방향 큼직한 역삼각형 인덱스와 왕관 모양 심벌 쪽이다. 역삼각형은 시각적으로 무겁게 디자인돼 섬세하게 디자인된 로렉스 왕관 심벌과 아래 텍스트가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이얼 중심 원과 핸드(시/분/초침)가 화려하게 디자인되어있어 아래로 낙하하려는 시각적 무게를 견디는 형세다.


툴 워치로서의 로렉스 정신을 잘 보여주는 광고


    하단은 제품명과 스펙에 대한 정보가 네 줄로 타이포그래피 되어있다. 정보 영역이지만, 하단의 넓은 여백을 홀로 감당하고 있다. 넓은 공간에 시각적 긴장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6시 방향 굵은 직사각형 인덱스와 얇은 서체로 디자인된 정보 영역은 극명한 시각적 대비를 이루고 있다. 어쩌면 서브마리너의 시각적 매력은 극명한 대비 요소들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12/3/6/9시를 제외한 인덱스는 모두 원으로 표현되었다. 원이라는 조형요소는 서브마리너 안에서 다양한 변주로 존재한다. 다이얼 바깥 12시 베젤에 존재하는 약간 작은 역 삼각형은, 12시 인덱스와 조응하는 시각적 위트이면서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원과 삼각형이 합쳐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핸드에서 원은 인덱스를 가리키기 위해 뾰족한 삼각형과 합쳐지지만(벤츠 핸즈) 크기는 인덱스의 원과 거의 동일하다. 초침 끝에 달린 작은 원은 인덱스 원보다 약 1.6배 정도 작다. 계속해서 다이얼을 돌아야 하기 때문에 시각적 무게를 조절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베젤과 다이얼의 블랙은 같은 명도로 디자인되었다. 이런 선택이 가능한 이유는 베젤과 다이얼 사이를 확실히 구분해주는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시각적 분절선이 없었다면 가독성이 상당히 떨어졌을 것이다. 저마다의 시각적 이유를 담지한 작은 레이어들이 차곡차곡 쌓여, 서브마리너는 여타 브랜드가 따라 하기 힘든 '우아한 마초스러움'이라는 신비한 위상학을 획득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럭셔리 시계 브랜드 중 순수 매출액으로 롤렉스는 단연 선두였다. 하지만 2019년 롤렉스는 애플 워치를 내세운 'IT 기업' 애플에 밀려 '시계 카테고리에서' 매출 2위가 되었다.




바우하우스 맛, 융한스 막스 빌

앞선 세 스위스 브랜드와 달리 독일 브랜드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이상할 정도로 한국에 인지도가 없는 브랜드 융한스다. 융한스는 1861년 독일 슈람베르크(Schramberg)에서 시작되었고, 당시에는 탁상시계와 벽시계를 중심으로 생산했다. 1927년부터 본격적으로 손목시계 생산에 들어갔고, 1960년대 바우하우스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인 막스 빌과의 협업으로 미니멀리즘 디자인의 손목시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막스 빌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디자인은 브랜드의 아이덴티티이자 동시에 바우하우스의 유산이기도 하다.


바우하우스 양식의 대명사, 막스 빌


바우하우스 스타일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익히 알만한 브랜드들을 '바우하우스화' 했던 프로젝트가 있는데 이를 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이 프로젝트를 보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지만, 복잡한 형태를 기하학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로 환원시킨다.

https://99designs.com/inspiration/logos/bauhaus

유명 브랜드의 '바우하우스화'


    바우하우스를 미니멀리즘과 동의어로 사용하는 측면이 있는데, 이는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오독하는 것이다.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말한 'Less is More'는 기능을 위해 필요한 최소 조형만 남기는 것이지, 심심하게 디자인하자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막스 빌로 돌아와 바우하우스풍 다이얼을 다시 살펴보자. 인덱스 위 숫자는 모두 사라지고 길이가 서로 다른 선만으로 분과 시를 나눈다. 중심 원에서부터 뻗어나간 가느다란 초침은 인덱스 길이의 딱 두배 정도로 디자인되었다. 12/3/6/9시 인덱스 위에는 시선을 붙잡을 수 있는 시각적 구두점이 원으로 디자인되었다. 12시에는 원 두 개가 시침 양옆으로 놓여있는데, 원 크기를 분침 간격에 딱 맞게 디자인하지 않고, 아주 약간의 공간을 남겨둔 것도 인상적이다. 시침바늘과 인덱스 길이도 아슬아슬하게 겹친다. 조형요소들 대부분 긴장감을 가지며 대치하고 있다. 상단에 존재하는 제품명은 글자 간 간격과 행간이 거의 일치한다. 바우하우스가 느껴지는 기하학적 서체도 인상적이다.


고집 있게 생긴 막스 빌

 

    1시와 11시 시침이 아래로 뻗어나가 브랜드 로고를 가리킨다. 로고는 두 줄이 되며 점차 좁혀져 마치 중간 원에 닿는 느낌이 난다. 방향에 따른 *게슈탈트 법칙이 발생한 셈이다.

    가장 하단에는 아주 작은 크기로 'MADE IN GERMANY'가 분침을 타고 둥글게 타이포 그래피 되었다. 시침 길이가 상대적으로 길게 빠져있어 하단 여백에 글자를 배치하기 애매했기 때문일 것이다. 12시 인덱스에 존재하는 두 개 원의 좌우 간격과 'MADE IN GERMANY'와 분침선 간 닿을 듯 말듯한 간격은 막스 빌이 가진 디자인에 대한 무서운 디테일의 은유처럼 느껴진다.

    여담으로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차고 다니던 시계가 바로 융한스 시계다. 덕분에 '가장 비싼 시계를 찬 교황'이라는 구설에 오르기도 했는데 실은 여동생의 유품이라고.


*게슈탈트 법칙 : 인간의 시각적 인식에 관한 이론. 그중 부분과 부분이 서로 유사성에 의해 그룹화되어 보이는 현상. 위 예시는 방향에 따른 유사성의 원리(the law of continuance)에 해당한다.




시각적 복잡도와 남성성의 상관관계, 브라이틀링 네비 타이머

파일럿을 위한 항공용 시계는 시간을 재기 위해 크로노그래프 기능이 들어가거나, 시차를 조정하기 위해 듀얼 타임 기능이 들어간다. 또한 긴박한 상황에서 잠깐 시계를 봐도 높은 가시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이얼 12시 방향에 삼각형이 들어간 경우가 많다. 파일럿 워치를 위한 시각 요소들은 시계의 복잡도를 상당히 증가시키는데 이는 곧 남성적 정체성으로 연결된다.


파일럿 워치의 상징, 네비타이머


그러한 측면에서 브라이틀링사의 네비 타이머는 가장 상징적인 다이얼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첫인상은 눈이 아플 정도로 많은 미닛 스케일(눈금)과 숫자들로 어질 하다. 이 시계를 가장 특별하게 만드는 지점은 카운터 세 개가 좌측으로 정렬돼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우측의 시각적 무게가 무너지기 쉽다. 그러므로 왼쪽 그룹과 상대적으로 비슷한 무게감을 가진 시각적 요소가 우측에 배치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네비타이머는 브라이틀링의 화려한 로고와 문페이즈 영역을 활용해 아슬아슬하게 시각적 균형감을 잃지 않았다.    

    인덱스의 12/3/6/9가 삭제돼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보통 이 네 숫자는 다이얼에서 어떻게든 시각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인덱스 네 개가 높은 복잡도 속에서 사라짐으로써 역설적으로 더 높은 강조의 위계를 획득하게 된 셈이다. 배색의 경우 인접 색인 레드와 옐로를 포인트 컬러로 사용했고, 가장 넓은 면들을 화이트와 네이비로 채웠다. 만약 네이비가 없었다면 이 많은 시각 요소들의 가독성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담으로 현재 브라이틀링 로고는 아래처럼 미니멀하게 바뀌었는데 많은 시계 애호가들 사이에서 개구리라고 놀림받고 있다.

미니멀해진 브라이틀링의 로고



'시계 다이얼로 살펴보는 UX/UI'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