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멋지게 뽑아 4B연필만 깎아버리린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제목이 눈길을 확 끌었다. 너무 보고 싶었던 영화였지만 코로나로 극장을 가기가 거시기해서 VOD로 풀리지마자 봤다.
남성중심의 영화 "범죄와의 전쟁"을 비튼듯한 포스터는 이 영화가 여성주의 영화를 표방한것이라 생각하게 했다. 그러나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여성주의라기 보다 학벌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등장한다. 좋은 학교를 나온 여성들은 당당히 정규직을 달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지 않은가?
이 영화들은 개미들의 이야기이다. 그게 성별, 학벌 등에서 우위에 서지 못한 여러 개미들이 회사를 위기에서 구해내고 영웅이 되는 이야기... 그렇게 영화는 개미들의 판타지를 복고와 개그 코드를 섞어서 풀어냈다.
시작은 창대했다. 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던 전반부는 꽤 만족스러웠다. 90년대 뉴트로의 분위기를 한껏 살린 영화의 분위기는 우리나라 대중문화가 폭발하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아주 반가웠다. 캐릭터 구축도 성공적이었다. 정의감이 투철한 자영(고아성), 똑부러지는 정유나(이솜), 순해빠졌지만 수학천재인 보람(박혜수), 영화의 초반부는 이 세명의 주연 캐릭터를 차곡차곡 쌓아 각자의 유니크한 캐릭터를 구축했다. 독특한 성격의 오상무, 성격은 더럽지만 일은 잘하는 홍과장, 윗사람 눈치보느라 정신없는 최대리. 캐릭터들이 각각 살아숨쉬며 명확하게 자기 바운더리를 구축하며 이들의 케미가 어떻게 극을 움직이게 할지 한껏 기대하게 했다.
그런데, 영화가 중반부 첩보영화 형태로 분위기가 급반전 하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캐릭터들이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하며,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보람이는 그 급박한 상황에 도대체 왜 금붕어를 들고 나오려 했는지는 아직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더 큰 문제는 후반부였다. 영화는 마지막에 반전을 보여주는데 이후 영화는 갑자기 급변한다. 개미들이 연대하여 거대악으로부터 회사를 구해낸다는 판타지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감독의 마음은 이해를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토익반 동료 직원들이 리스크에 대한 고민없이 주인공 3명의 조력자로 등장한다. 주인공 3명은 초반에 워낙 캐릭터를 잘 구축해서 이런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게 이해가 되었지만, 다른 여직원들은 도대체 왜 이런일에 뛰어드는 것인지 아무 설명이 없다.
개연성은 무시하고 대신 극적으로 클라이막스를 만들려다보니 무리한 장면들을 연달아 집어넣었다. 정말 얼굴을 화끈화끈거리게 해서 히터가 필요없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반전을 극대화하고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는데 이러한 목표까지 가기엔 작가의 상상력이 부족했던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는 용두사미다.
영화에서 주인공 자영은 "칼을 뽑았으면 4B연필이라도 깎아야 할것 아니냐"고 외친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는 칼을 멋지게 뽑아 4B연필만 깎아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