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UE Aug 15. 2021

[다시쓰는 안데르센 세계명작]아이는 마을이 키운다.

성냥팔이 소녀의 한 달

공고

연말을 맞이하여 모든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니 평온한 연말이 되시길 바랍니다.

-ㅇㅇ경찰서 서장 하이엔드 라우리드센




어느 12월, 온 동네가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들떠있다.

푸줏간은 커다란 칠면조와 닭을 훈제해 걸어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마리 부인의 가게는 양젖을 한가득 끓여서 치즈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채소가게의 캐롤린 여사는 반토박으로 깨진 당근과 감자를 물에 씻으며 어떻게든 팔아보려 애쓰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날이라서 주부들의 손과 지갑이 바쁜 날이기도 하다.

생선가게에서는 아침에 잡아온 생선을 보며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좋은 생선을 잡았지만, 자투리 생선도 많이 잡혀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주변 상인들과 구워서 먹어버릴까, 싸게라도 팔아볼까 하며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분주한 마을의 분위기와는 달리, 성냥팔이 소녀의 집은 우중충한 습기와 추위가 감돌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늘도 술드셨구나..'

소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빠가 술 드시는 날은 곧 그녀에게 모든 폭언과 폭행이 쏟아지는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새까만 얼굴에 덩치는 또 커서 온갖 물건을 집어던지고 그녀에게 분풀이를 했다.

하지만 술을 안 드시는 날은 없었다.

소녀가 돈을 조금이라도 가져와야 아버지의 기분이 좋아지실 텐데, 성냥 하나 팔아서는 아버지의 기분을 맞출 수 없다.

이런 12월의 설레는 마을은 소녀에겐 가혹한 현실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줬고, 나도 저렇게 평범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소녀를 괴롭혔다.

소녀의 아버지는 세상을 비관하고 있었다.

내가 술을 마시는 게 다 세상이 이지경이라서 그렇다, 딸년은 돈도 못 벌어 오고 있으니 내가 술을 마실 수밖에 없다.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정상이다.

그는 알코올에 정신마저 먹혀버린 피해망상에 찌든 한 사람 일뿐.

소녀는 성냥을 바구니에 담아 거리로 나갔다.

"성냥 사세요"

누군가 내 말 좀 들어주세요

소녀의 목소리는 아무것도 먹지 못해 힘이 나지 않았고, 그럴수록 그녀의 성냥은 팔릴리 없었다.

터벅터벅 걸어가며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도 보았다.

"성냥 필요하신 가요? 여기 있어요"

"공짜로 준다는 거냐?"

"아뇨.. 그건 아니지만.."

혀를 차며 신사는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때, 멀리서 아이들이 뛰어왔다.

허름한 행색에 거친 말을 쓰며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동네에 유명한 골칫덩이들이었다.

"이야압! "

그들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소녀를 넘어트렸다.

"오늘도 성냥 팔러 나왔냐?"

"성냥을 담기엔 바구니가 너무 약한 거 아냐?"

"더 작은 거에 넣어야지!"

그들은 그녀의 바구니를 빼앗아 길바닥에 던졌다. 그들의 우악스러운 팔에 낡은 바구니는 금방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서졌다.

지나가던 사람들 아무도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아니, 끼어들 수 없었다.

자칫 다음 타깃이 내가 될 수 있으니 몸을 사렸다. 그들이 떠난 후, 그녀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바구니가 없어도 된다. 손으로 들고 다니면 되니까. 하지만 성냥이 눈에 젖어버렸다. 성냥은 젖으면 팔 수가 없는데..

다시 집에 돌아가면 분명 아버지에게 호되게 맞을 것이다.

어제 맞은 등이 아직도 아픈데 또 맞는 것은 너무 무섭다.

그녀는 젖은 성냥의 눈을 탈탈 털고는 치마에 곱게 싸서 물기를 닦고 주머니에 담았다.

다행히 젖지 않은 성냥은 손에 들고 길을 걸으며 사줄 사람을 찾았다.

채소가게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안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에구머니나, 얘, 너 어디서 이렇게 젖었니?"

"아주머니, 성냥 좀 사주세요"

채소를 정리하던 캐롤린 여사가 소녀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넘어졌어요.."

여사는 소녀의 행색에 하나라도 사주고 싶었지만, 오늘 채소는 한 개도 팔리지 않아서 쓰지 않는 성냥을 샀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남편과 싸울 것이 틀림없었다.

"어휴.. 또 그놈들이구만. 미안하구나, 오늘 하나도 못 팔아서 돈이 없구나"

소녀는 역시 그렇지.. 생각하며 공손히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얘! 잠깐만"

소녀를 불러 세운 캐롤린 여사는 그녀에게 자투리 채소 몇 개를 바구니에 담아 주었다.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종일 먹지 못한 그녀는 부러진 당근을 보고 너무 먹고 싶었지만, 차마 먹을 수 없었다.

이 당근을 술집에 가져가면 술을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술 마시는 아버지는 너무 싫지만 그거라도 가져가지 않으면 오늘도 매를 맞을 것이다.

오래된 정장을 입고 자신은 신사라며 으스대지만, 마을에서도 도박쟁이들과 어울려 다니는 질이 안 좋은 사람이다.

채소를 들고 술집으로 찾아가 술을 조금 얻을 수 있나 물었지만, 술집 사장님의 대답은 그녀의 희망을 짓밟았다.

"너네 아빠가 지금까지 외상 해간 게 얼만데 이까짓 채소 몇 개로 술을 달라고? 이걸론 외상값 반도 못 갚아!"

하며 그녀의 채소를 가져가 버린 것이다.

이 정도로 해결될 술값이 아니었나.. 그동안 아버지가 얼마나 비싼 술을 마시셨던 걸까.

이 작은 아이가 벌어온 돈이 왜 아버지를 화나게 했는지 알게 되었다.

쫓겨나듯 술집을 나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아가, 잠깐 이리 와 봐."

리부인 이었다.

"애는 잘 먹어야 돼."

짧은 한마디를 남기며 그녀의 입에 치즈 조각 하나를 넣어주었다.

"옷이 다 젖었잖니, 우선 옷이나 말리고 가렴."

그녀는 소녀를 끌고 치즈공방 안에 앉혔다.

끓이던 우유를 한 컵 내어주며 말했다.

"동생이 얘기하더라. 술집 사장이 너한테 몹쓸 소리 하고 내쫓았다며?"

술집 직원인 마샤는 마리 부인의 동생이다.

동생이 쫓겨난 소녀를 걱정해 언니에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제 탓이에요"

"어머 그게 왜 니 탓이야! 니 아버지 탓이지! 나도 자식 앞에서 부모 욕하긴 싫다만, 니 아버지 때문에 니 꼴이 이게 뭐니? 한참 사랑받고 클 나이에."

"죄송합니다.."

하루 종일 추위에 지쳐있던 소녀는 뚝뚝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원망했다.

난 왜 내 또래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없는 걸까.

마리 부인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깜짝 놀라 얼른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서 아빠한테 맞을 거란 각오를 하고, 문을 열었는데, 집이 조용했다.

그리고 집은 어질러져 있었다.

소녀는 아빠가 없는 빈집이 무서워졌다.

나를 때리는 아빠는 없지만, 아직 아빠의 기분이 어떤지 보지 않았기에 아빠를 기다리는 이 시간이, 고요한 집이 너무나도 생경해서 내 집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소녀는 밤새 공포에 시달렸다.

문밖의 말소리에 혹여나 아빠일까 깜짝 놀라서 깨고, 자다가도 끼익 문이 열리는듯한 환청에 수십 번을 잠에서 깨어 바깥소리에 귀를 집중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만 들릴뿐, 인기척은 없었다. 오죽하면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창문 밖 그림자에도 아빠의 그림자일까 하며 조마조마했을까.

날이 밝았지만, 아빠는 밤새 들어오지 않았다.

이른 아침, 바깥이 사람들이 깨는 소리로 시끄러울 때쯤, 시린 눈을 비비고 겨우 밖으로 나갔다.

12월의 아침은 차가웠고, 오늘도 밤새 내린 눈이 하얗게 쌓여있었다.

주변에 아빠가 없는 것을 확인 후, 성냥을 챙기는데, 끼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다. 빨리 나가버릴걸. 바깥을 확인하지 말고 눈 뜨자마자 나가버릴걸.

"아빠.. 오셨어요"

하고 뒤를 돌아봤다.

문 앞에는 아빠가 아닌, 경찰이 있었다.

아빠가 들어오지 않은 것과 관계가 있을까.

그녀는 수십 번 생각하는 새, 경찰이 먼저 말을 걸었다.

"네가 이 댁 딸인가?"

"네.."

"오늘 오전 10시경, 어디에 있었지?"

"성냥을 팔러 나갔어요"

"그리고 집은 몇 시에 들어왔지?"

"어제.. 해 지고 나서 들어왔어요"

"이 사람을 본 적 있나?"

그가 꺼낸 사진에는 수염이 덥수룩한 노인이 있었다.

"아뇨.. 모르는 사람이에요.. 아버지는 어디 계시나요?"

"어제 오후에 체포되었다. 술 마시고 사람을 죽였지."

"... 아버지 가요?"

소녀는 기뻤다.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다는 것보다

당분간이라도 아버지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이 아이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경찰은 소녀에게 아버지의 재판이 곧 시작될 것이며, 형기가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못할 것이란 말을 남기고 갔다.

경찰이 가고 난 후, 소녀는 안도감에 눈물이 흘렀다. 경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소녀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이제는 밤이 두렵지 않다. 매일매일 두려움뿐이었던 이 집이 이제야 안락해졌다.

아빠가 없으니 편하게 밥을 먹고, 편하게 일을 할 수 있고, 맞지 않아도 된다.

매일매일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는 아버지였다.

그녀는 드디어 약자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아버지가 체포된 후, 그녀의 집엔 여러 사람이 찾아왔다.

먼저 찾아온 건 술집 사장이었다.

"외상값은 어떻게 할 거야?"

"제가 돈이 생길 때마다 가서 갚을게요"

"성냥 팔아서 벌어봤자 얼마나 된다고. 내일부터 우리 가게 와서 잔심부름이나 해"

그 말을 남기고 나가버렸다.

아빠는 매일 술을 마시고 소녀를 때렸다. 술에 대해서 안 좋은 기억만 가득했고, 술 마신 남자들만 보면 멀리 피해 다녔다.

그런데 술을 파는 술집에서 일을 하라니..

죽기보다 싫었다.

매일 그런 사람들을 보는 게 너무 싫었다.

한동안 바닥에 앉아있었다.

이제 와서 아빠가 없다는 것에 실감이 났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떻게 될지, 생각하다 새삼 나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구나, 하는 현실을 느꼈다.

어쩜 이리도 가혹한가.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났다.

나를 위해 다 해주셨는데..

할머니의 손길에, 부모님의 손길에 평범하게 자랐어야 할 나이였다. 할머니만 계셨어도 이렇게 일찍 어른이 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할머니가 만들어주셨던 부드러운 감자수프와 케이크가 생각났다.

어린아이 먹이려 우유를 많이 넣고 부드럽게 끓인 수프는 항상 따뜻했고, 행복했다.

따스한 그 맛이 생각난다. 그리고 그때의 그 시간들이 생각났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한참 추억을 되새기고 있을 때, 집 문이 열렸다.

캐롤린 여사였다.

"너 괜찮니?"

"여사님? 갑자기 무슨 일로.."

채소가게엔 외상값이 없을 터였다.

"아빠 체포됐다면서? 너 혼자 있을 것 같아서 와봤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모르겠어요"

"갈 데는 있고? 친척이라던가, 다른 가족들은 계셔?"

"모르겠어요.. 없겠죠.."

"뭐 할 줄 아는 건 있고?"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다.

누군가 가르쳐주는 사람도, 그럴 사람도 없었다.

캐롤린 여사는 집을 쭉 둘러보았다.

경찰이 왔다 가서 인지 집은 난장판이고, 구석엔 먼지도 쌓여 굴러다녔다.

부엌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바싹 말라있었다.

"어휴.. 우선 이리 와 봐."

여사는 그녀를 잡고 집 청소를 시작했다.

물건을 정리하고, 그녀에게 청소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녀가 가게에서 가져온 채소들로 간단한 음식 만드는 법도 가르쳤다.

채소를 손질하고 오래 보관하는 법, 칼은 위험하니 최대한 칼을 쓰지 않고 할 수 있는 요리들을 알려줬다.

그렇게 한바탕 집을 정돈하고 나니, 집이 밝아졌다. 아빠가 있었을 때의 컴컴하고 습한 집이 없어졌다.

집의 먼지가 사라지고 햇빛을 받아 집안 공기가 상쾌해졌다.

곰팡이가 사라지고 좋은 냄새가 나고, 부엌은 집기들을 꺼내 씻어놓고 정리하니 집에 생기가 돌았다.

"여사님, 이렇게까지 해주시고.. 감사합니다"

"아냐~ 조만간 농장에서 사람이 올 거야"

"농장에서요? 왜요?"

"일손이 부족하대. 이 동네에서 니 나이에 일할 곳이 얼마나 있겠어. 농장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성냥 파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그 말을 남긴 후, 돌아갔다.

그녀에게 앞으로 남은 삶은 아버지가 있을 때보다는 나을 것이다.

가족 없이 살아가야 하겠지만, 그런들 어떠랴.

아이는 마을이 키운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두 번째 할머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