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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Sep 07. 2020

이름 가진 존재로 살아가기

내가 나인 채로 살아가는 건 어려워

    가끔 숨을 쉬기 어려워질 때가 있다. 죄책감이 목끝까지 차올라서 조여드는 것 같고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으면 목 옆에서, 귀 뒤에서, 팔뚝에서, 몸 어딘가에서 심장이 거세게 뛴다. 아주 선명하게 들리는 심장 소리, 차라리 고동에 가까운 박동, 뚝, 뚝 뚝, 하고 끊어진 듯 울리는 맥박을 느끼면서, 살아있음을 그 어느 때보다 의식하면서, 살기 위해서 숨을 몰아쉬면서, 나는 살아있음이 버거워진다.


     그 죄책감이란 다름 아니라 내가 나를 유기하고 있다는 의식이다.



    처음 증상이 나타난 건 교환학생 생활 중의 일이었다. 크리스마스 방학에 접어들 즈음 안 그래도 적었던 활동량이 심각하게 줄어든 나는 매일 침대에 드러누워 하루를 보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집 앞 5분 거리의 REWE에 장을 보러 갈 때를 제외하면 방 밖으로도 잘 나가지 않았고, 매 끼니를 꼬박꼬박 과식한 탓에 속이 더부룩했지만 짧은 산책조차 꺼려졌다. 잠이 오지 않았고, 안 그래도 상당한 수준이던 알코올 의존이 점점 심해져 매일 동틀 때까지 글뤼바인과 맥주를 리터 단위로 마시고 머리 끝까지 취해야만 기절하듯이 잠들 수 있었다. 그마저도 두세 시간 후면 깨어버려서 수면 부족으로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대학교 1학년 때도 약한 우울증 (다시 생각해보면 약했던 것이 맞긴 한가 싶지만, 여하간에 지난 4년 간은 그렇게 생각했으므로)을 겪었지만 이런 수준은 아니었다. 그때는 꼬박꼬박 나가야 할 아르바이트가 있었고 수업이 있었고 매일 동아리와 스터디 모임이 있었고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었으므로 나의 우울이란 일과를 마치고 늦은 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소리없이 우는 것, 혼자 저녁시간을 보낼 바에야 술과 수면유도제를 먹고 가능한 빨리 잠들어버리는 것이 전부였다.


    이번에 달랐던 것은, 내게 아무런 생활의 감각도 주어지지 않았단 사실이었다. 나는 철저하게 자유로웠다. 장학금은 교환생활에 수반되는 모든 경비를 해결하고도 여러 차례의 여행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여유있게 나왔고, 수업은 출결이 자유로운데다 시험도 학기 말 한 번. 그마저도 F만 받지 않으면 되었으니, 나는 억지로 무언가를 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돈을 벌지 않아도 되었고,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되었고, 타인에게 멀쩡해 보이기 위해 일부러 기분을 전환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냥 우울한 채로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그런 생활이 관성이 되자 나는 늘 같은 상태로 집안에 머무르게 되었다. 곧 방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무서워졌다.


    약한 대인기피증은 늘 가지고 있던 것이지만, 백인이 가득한 시골 도시에서 작은 동양인 여자애로서 번번이 주목받는 경험은 안 그래도 위축되었던 내게 무시 못할 위협이 되었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좁은 방안, 음식물 쓰레기조차 제때 내놓지 않아 퀴퀴한 냄새가 나고,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것도 무서워 창문을 반쯤 열고 화재감지기가 울리지 않게끔 커튼 바깥에서 조심조심 연기를 내뿜는 나는, 딱 4평 원룸 정도 크기의 비좁은 자아 안에 갇힌 것 같았다. 내 자신이 구질구질하게 느껴졌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그나마 있는 수업은 깨어 있으면서도 나갈 용기가 안 나 번번이 결석했고, 리딩 자료는 읽지 않았다.


    그리고 그럴수록 내 자신이 싫어졌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점점 포기하는 것들이 늘어났다. 침대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늘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지만 친구의 메시지에 답장하는 일은 숨이 막히게 버거웠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값싼 여행지를 훑고 저가항공사를 이용해 비행기표를 예매했지만 숙소를 구하거나 여행지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를 알아보는 일조차 어려웠다. 머릿속 한켠에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하지 않는 일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슴 한가운데가 부러진 듯이 아팠다. 두통이 계속되고 목 뒤가 굳은 듯이 배겨 견딜 수가 없었다. 브뤼셀로의 여행을 이틀 앞둔 날, 이제는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겨우 일어나 숙소를 알아보려는데, 노트북을 켜고 침대에 걸터앉는 순간에 가슴께가 크게 아파오며 호흡곤란이 찾아왔다. 물이라도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비틀거리며 일어났는데, 삽시간에 앞이 캄캄해졌고 들고 있던 생수병을 놓치며 그대로 쓰러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떻게든 눈을 뜨긴 했지만 눈앞이 새카맣고 아주 멀리 희미하게 낮은 생강빛의 전등불만 보이던 기억이 난다.


                       내가 있던 방엔 분명 하얀 형광등 불빛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는데.

                               눈앞은 온통 낮고 캄캄하고 어둑한데 무섭지는 않았다.

                                    그곳은 어디였을까.



    나의 신체와 정신이 이렇게까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지독한 두통과 호흡곤란은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고 있을 때, 미루어 둘 때,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질 때, 내게 집중할 때, 그러니까 깨어있는 대개의 시간에 찾아왔고, 내가 나 외의 다른 것에 몰두하고 있을 때면 거짓말처럼 사라지거나 덜어졌다. 힘겹더라도 수업에 들어가 독일인 할아버지 교수님의 툭툭 끊어지고 단어와 단어사이에 덩그라니 빈틈이 남는 느린 문장에 신경이 붙들려 있을 때면 통증도 잊힐 때가 있었다.


            (아하, 그러니까. 나는 내가 정말이지 싫은가 보군.)


    여행을 하고 있을 때면 한결 나았다. 내 관심은 내 육체 외부로 쏠렸고, 나는 그곳에서 익명의 존재, 잠시 스쳐지나가고 말 여행자로서 머무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관계를 망쳐도 아무런 탈이 없을 다른 여행자들, 현지인들과 만나 저녁과 술을 함께하고 비좁은 도미토리룸 2층 침대에서 적당히 서로를 피하고 적당히 대화를 나누다 서로를 외면하고 잠이 드는 것, 느긋하게 일어나 모르는 거리를 무작정 해가 질 때까지 걷는 것, 가끔은 카우치 서핑으로 머무는 집에 돌아가 곧 헤어질 집주인과 TV를 함께 보는 것이 좋았다. 그때만큼은 June이라는 이름의 '동양인 여자애'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요컨대 문제가 되는 것은 나 자신보다는 내가 나로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여행하고 있을 때의 나는 아주 일시적인 존재로서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잊힐 것이며, 그런 확신 속에서 나는 여행 전후와는 반틈 단절된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굳이 부연하자면 내가 내 자신에게 허락한 유예. 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골목을 걸으며 작은 체구의 여자애에게 사람들이 보이는 호의에 감사하고 레이시스트를 만나 불쾌한 일을 겪어도 금세 망각했으며 때로 일부러 늦은 밤 혼자 인적 드문 언덕길을 걷거나 깜깜하고 인적 드문 비탈길에서 모르는 남자가 준 뚜껑 열린 와인병을 건네 받아 입안에 털어넣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때로는 평소보다 소심했고 때로는 평소보다 과감했다.


    하지만 계속 한 자리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서의 나는 달랐다. 나는 그러니까, '평균치의 나'에 한없이 근접한 생활을 유지했다, 혹은 그래야 했다. 이 삶은 한 권의 책이 아니라서 내가 아닌 누군가, 그러니까 전지적인 작가가 대신 노력해준 덕에 그 다음 챕터에서 자연스럽게 스토리가 전개되고 문장이 다듬어지고 어느 새 성장한 '나'가 되는 일이란 없었고, 이번 에피소드와 다음 에피소드 사이 정지 버튼을 눌러두고 숨을 돌릴 수도 없으며, 캐삭도 불가능하고, 이벤트성으로 선심 쓰듯 쥐여주는 닉네임 변경권이나 스킬트리 초기화 스크롤도 없고, 무엇보다 좆됐다 싶은 순간에 세이브 파일을 불러오거나 원하지 않는 장면에서 스킵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삶을 견디고, 유지하고, 노력하여 개선하고, 미래를 대비하며 새로운 삶을 준비해야 했다. 나를 유기한다면 그것은 이 순간의 나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앞으로의 수많은 나---를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므로, 내가 버려둔 시간은 끝내 나를 쫓아오기 마련이므로, 여행하지 않는 순간의 나는 그런 나태를 내게 허락할 수 없었다.


    내 삶을 앞으로도 혼자 꾸려갈 것이라면, 나밖에 책임질 사람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그만두어선 안 돼. 무너지면 안 돼. 큰일이 날 거야. 이런 식으로 살아갈 수는 없어. 무너진 채로 살아갈 수는 없어. 한번 무너졌다간 다시 일어서기 힘든 걸 알잖아, 기타 등등. 우스운 일이지만 그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회복이 어려웠다. 나를 유기하는 일이 다시 허용되리란 보장이 없으므로 나는 지금의 무책임한 상태를 쉽게 놓아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유기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유기된 상태에서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런 감정을 어떻게 하면 보다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냥 나는 내 생각보다 좀 더 지쳐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작 몇 개월, 점점 더 허약해져가는 신체와 날이 서 예민해지는 정신을 대가 삼아 우울감에 젖어 지내던 사치스러운 생활은, 결국 내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마무리되었다. 내가 아주 위태롭고 불균형하며 쉽게 망가지는 존재라는 깨달음을 제외하고는. 움직이지 않으며 보낸 시간 동안 찐 5kg는 한국에 돌아와 아르바이트를 하고,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치르고, 버릇대로 술자리에서 안주 없이 술을 들이키다 보니 쑥쑥 빠졌고, 공황장애와 비슷한 감각도, 가슴의 통증도, 호흡 곤란도 최근 반 년을 통틀어 고작 두어 번이나 희미하게 경험했을까. 일상적 카톡 답장 텀이 유의미하게 길어진 것과 강박적인 완벽주의가 약간 시들해졌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내 인생에 큰 자취를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June이 차지한 내 인생의 6개월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살아간다. 내게는 여전히 두 개의 이름이 있으며, 어느 쪽도 내멋대로 지워버릴 수 없고, June인 나와 흔한 한국이름을 가진 나를 편한 대로 나누어 생각할 수도 없다. 둘 다 이미 나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아직도 미래를 자주 고민하지만 무엇이 최선의 선택인지 몰라 끊임없이 선택지를 유기하고 유예하며 나도 모르는 길로 자꾸 내 삶을 밀어넣는다. 그렇기에 나는 아직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나중에 내가 괜찮아진 것 같아도 나는 꼭 상담을 받으러 가야 해. 괜찮아 보여도 괜찮지 않아," 스스로 되뇌던 것마저 아직 기억에 남아있지만, 당장 뚜렷한 증상이 없는 나는 상담 역시도 코로나를 핑계로 다시 미룬다.


    나는 지금은 아주 괜찮은데. 보란 듯이 괜찮은데.

    하지만 나의 이름 아래에는 삶을 단절시킬 수 없는 자로서의 초조함이 나를 좀먹고 있음을 알기에,


    나는 언젠가 이 문제를 다시 마주해야 함을 안다. 누군가 심폐소생술을 하다 말고 내뺀 듯 가슴뼈 한가운데가 콱 부서지도록 눌리는 통증도, 답답할 때면 유난히 버거워지는 호흡도, 영영 멎은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분명 다시 찾아올 것이다. 나는 정자로 쓰인 내 이름 뒷면에, 친구가 다정하게 부르는 내 이름 세 글자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안다. 언젠가 그 자리에 도사린 무게가 다시 나를 짓누를 텐데, 그 소름끼치는 부하負荷를,



                내가 다시 감당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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