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질과 자기애自己愛의 콜라보레이션 속에서
어렸을 때부터 기억되는 일이 병적으로 싫었다. 이를테면 어딘가의 단골이 되는 일,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일 같은 것들. 항상은 아닌데 적어도 중학생 때부터는 꾸준히 그랬던 것 같다. 집 근처에 편의점을 두고도 매번 같은 곳에 가는 게 싫어 빙빙 돌아 매번 다른 가게를 찾았고 나를 걱정해주는 친절한 약국을 찾아도 그 다음 번에 들를 때는 다른 약국으로 향했다. 같은 가게에 갈 때면 혹시라도 "또 오셨네요?" 소리를 들을까 봐 긴장했다. 그건 호흡이 어려워지거나 배가 아파오는 수준의 불안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피하기 위한 과정에 수반되는 모든 번거로움을 감수할 만큼의 것은 되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대비하지 않은 순간에 누군가에게 목격되는 것, 누군가 나도 모르는 새 나를 평가하는 것, 마음의 준비 없이 타인과 말을 섞어야 하는 것,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정확히 정의 내리기 어려운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
내가 우려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결국 자의식과잉에서 우러난 것일 뿐이며 나는 특별하지 않고, 아무도 내가 생각하는 만큼 내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진리는 남들보다 일찍 깨달은 편이었으나 그럼에도 어딜 가나 '나를 알아보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은 그치지 않았다. 굳이 내게 말은 걸지 않는다 하더라도 카운터에 앉은 아저씨가 나를 보고 '저 학생 어제도 왔던 사람 아닌가' '맨날 삼각김밥만 사가네'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제발 날 좀 보지 마. 기억하지 마. (단골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지도 마.)
왜 싫을까. 기억에는 항상 왜곡이 뒤따르기 때문일까. 사람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어볼 때면 그 속엔 대개 (내가 생각하기로는) 내가 아닌 내가 멀뚱히 서 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그들이 본 '나'도 나인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그건 내가 알고 내가 짜맞추고 내가 생각하는 '나'와는 거리가 멀다. 문제는 이런 거다: 그러면, 내가 아는 '나'라는 게 타인에겐 어떻게 해도 온전히 전달될 수 없다면 결국... 나중엔 무엇이 남는 거지?
나는 주로 소심하지만 가끔 주도적이고 항상 자존심이 강하고 드물게 쾌활하고 대개는 피곤한 얼굴을 하며 일년에 한두 번쯤이나 겨우 생글생글 웃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 빈도로 남기고 마는 조각들, 나로부터 투사되고 나를 아는 각자를 프리즘처럼 투과해 새롭게 해석된 '나'의 파편들을 모두 모아서 맞추더라도 어딘가엔 분명히 비는 공간이 있기 마련인데, 기억되지 않는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라면. 그렇다면 내가 사라지고 나면 나만이 분명히 아는, 혹은 나조차 알지 못하는 '나'는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그대로 사라져도 괜찮은 걸까?
(나는 사혼의 구슬이 아니라서 깨뜨려 조각난 파편을 일일이 주워 맞춰줄 사람도 없을 뿐더러 본드로 이어붙인 자리엔 균열이 남기 마련인데.)
누군가의 평전을 읽을 때면 그런 생각이 남는다.
이 글은 무척 훌륭하지만, 평전의 주인공인 이 사람은 적어도 이런 사람(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평전은 궁예질로 수렴한다.
그리고 나는 미처 궁예되지 않은 그 틈이 궁금하다.
그 문제를 차치하고서도, 나는 일단 오해되고 오독된 '나'로 인해 정작 내가 설 지평이 좁혀지는 일 자체가 싫었다. (캐릭캐릭체인지를 본 적 있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그럴 바에야--그러니까 내가 수습하지 못할 나에 관한 어떤 단면, 파편을 흘리고 다니느니 (즉 나로서는 통제 불가능한 특정한 일관성 아래 기억되느니)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내가 보이고 싶은 모습만 보이고 내가 의도한 대로만 기억되고 싶다는 결벽증에 가까운 유치한 마음. 이런 건 빨리 떨쳐낼수록 좋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해서 좋은 것을 순순히 실천할 정도의 용기와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이미 12살에 부자가 된 키라였을 것이다. 나는 차라리, 사람들이 나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익명의 존재로 남고 싶다.
그런 면에서 이건 완벽에 대한 어설픈 갈망, 그리고 자기애(自己愛)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 외부에 관한 모든 사유가 대개 궁예질로 수렴하는 법이라면 나에 대한 모든 집착은 (당연히 자기혐오마저도) 자기애로 수렴하기 마련이므로.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이 좋다. 어디든 내가 스쳐가는 인상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곳. 기억된다는 점에 부담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곳. 모든 것은 피상적일 때에만 더 좋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든 것이 새로울 때에만. 내가 무언가를 영영 망쳐버릴지도 모른다는 부담감 없이. 떠나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곳. 혹은 그렇다고 착각할 수 있는 곳."
"그곳에서조차 나는 나로서만 존재할 수는 없지만."
작년 10월 초, 파리 여행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가는 길. 벨기에 시골을 경유하는 텅 빈 지역기차 안에서 나는 손바닥만한 노트에 이런 글을 적었다. 사실 '온전한 나'라는 것은 헛된 희망에 불과할 것이다. 혼자 토굴에서 숨만 쉬고 살지 않는 이상 나는 수많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보이는 나'로서 살 수밖에 없다. 기억되고 기록되지 않은 모든 것은 결국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아직까지도 미련을 놓지 못해서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과 아는 사람을 두루 피하고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는 덜컥 겁부터 집어먹는다.
그러면서도 나는 문을 열고 나가 사람을 만난다. 만나고 또 새로 만나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가끔은 술기운을 빌어 과잉된 진심을 털어놓고, MBTI 테스트와 동물의숲 테스트와 대통령 테스트를 하고 사람들과 열심히 공유한다. 오독되고 싶지 않다는 바람은 결국은 제대로 읽히고 싶다는 열망이므로.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나를 기억하지 마.
(하지만 동시에) 제발 나를 기억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