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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Oct 26. 2020

고슴도치식 고백법

상처를 보여주기 적당한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처음으로 휴학을 한 18년도 봄, 단과대 행정실에서 풀타임 근로장학을 시작했다. 내 전임자는 그곳에서 고작 한 달 근무한 해당 단과대 소속 학생이었는데, 학번을 들어보니 나와 동갑인 모양. 행시 준비를 하러 신림으로 떠나는 길에 내게 하루 날을 잡고 인수인계를 해주었다. 단과대 건물 구석구석을 돌며 각 강의실 및 설비를 소개 받고 대여해 줄 장비의 간단한 조작법과 주의사항을 듣고 있자니 어느덧 오후 시간이 되었고, 나는 남은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그 사람과 잡담을 하게 되었다.


    고작 얼굴 하루 보고 말 사람인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째선지 나는 그 사람의 가족관계에 대해서 듣고 있었다. 그의 누나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든지, 자신은 막둥이인데 이미 사회에서 자리 잡은 가족들이 부담을 준다든지, 이번 고시도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누나가 자신 때문에 기회를 박탈당한 적 있어 미안하고 어쩌고저쩌고... '이런 얘기를 왜 나한테 하고 있지...' 하는 마음으로 적당히 리액션을 해주던 중 발견해버렸다. 그의 촉촉한 눈빛을. 아 시발... 우냐...? 진짜...? 내 앞에서 울 거야...? 정말......?


    아니 그러니까 이런 깊숙한 이야기를... 왜 초면인 나한테 하고 있는 건데...? 대체 왜요? 옆자리에 앉은 동료 근로장학생이 흘끔흘끔 우리를 쳐다보다가 그때부터는 최대한 관심을 끄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내 전임자는 평소 사교성은 좋지만 자기 개인적인 이야기를 그렇게 잘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아마도 고시촌으로 떠나는 길이라 감성이 흘러넘쳤던 거겠지. 왜 초면인 사람한테 굳이, 가 아니라 오히려 하루 보고 말 사이라서 할 수 있었던 얘기인 모양이다.


    그로부터 몇 주 지나지 않아 교내 한국어센터의 프로그램으로 곧 한국에서 장교로 복무하게 될 미군 훈련생들을 만나 한국어 연습을 도와주는 활동을 하게 됐다. 오리엔테이션 시간. 약 10분 간 자유시간이 주어지자마자 처음 얼굴을 마주한 나의 파트너는 난데없이 자신의 불우한 개인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무슨... 빈민가 출신에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본인도 우울증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여튼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시발이게뭐지... 를 속으로 되뇌면서도 침착하게 힘든 이야기일 텐데 내게 들려주어서 고맙다, 상처가 치유되길 바란다고 답했다. 나는 내게 무슨... 고민을 들어줄 관상 같은 거라도 있나, 올해 운세에 뭐가 꼈나, 사주를 봐야 하는 건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렇게 자기 속을 쉽게 뒤집어 까 보여주는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지 궁금하다. 그 사람의 안에 나라는 사람이 타인으로 존재하기나 할까. 타인, 그러니까 자신의 내면 세계를 마음대로 투사하면 안 되는 사람으로서 존재하기는 할까. 그냥 텅 빈 벽, 투사체가 아니라 감정이 있고 생각이 있고 역사도 있고 나름의 사정도 있는 사람으로, 개인으로 비춰질까. 아니면 그들에겐 내가 위로를 쉽게 건네줄 사람으로 보였던 걸까.


    적어도 그들에게 나는 대상으로만 존재하지 개인으로 존재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가 위로를 건네야 하는 사람으로 강제로 위치가 고정되어 버리는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다. 애초에 위로를 그렇게 잘 하는 편도 아니고.




    내가 유달리 까다로운 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어지간하면 개인적이고 심각한 이야기는 굳이 털어놓고 싶지 않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더라도 그렇다. 가끔은 서로의 비밀과 상처를 조금씩 교환하며 신뢰를 쌓아야 할 때도 있음을 알지만, 무거운 이야기를 받기만 하고 내 것을 꺼내놓지 않을 때면 결코 제대로 된 관계가 성립하지 않음은 알고 있지만, 어쩐지 나는 내 이야기를 하는 게 쉽지 않다. 내 이야기를 언어로 풀어내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건 보통 아주 오래 되풀이해 생각해본 후에나 가능하다. 술에 엄청 취했든지.


    그래서 얕은 관계에서 자신의 취약점을 난데없이 들이미는 사람을 볼 때면 갑자기 웃통 까고 맨 등을 내미는 사람을 도서관에서 마주친 기분이 되어버린다. 아니 어쩌란 거지... 우리... 옷 한 겹 정도는 좀 걸치고 삽시다. 본인의 취약한 부위를 그렇게 막 보여줘버리지 말고...


    나는 나의 내밀한 고민들은 차라리 이런 플랫폼 같은 개방된 공간에서 늘어놓는 게 편하지,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고 이야기하진 못하겠다. 그렇게 마주치는 일상의 사람들은 그냥 나를 적당한 무관심으로 대해줬으면 좋겠다. 걱정하거나 동정하는 사람들은 원하지 않아. 나한테는 그냥 이런 일이 있었고 그걸 가끔은 나 혼자만 알고 있다간 터져나갈까 봐 황급히 아무 곳에나 털어놓을 때도 있지만 적어도 그건 어떤 장소여야 하지 한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지워지는 짐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는 관계에 무게가 없었으면 좋겠다. 뿌리를 내린다면 아주 얕았으면 좋겠다. 함부로 내 심장을 쥐여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게 내 심장인 줄도 모르고 내가 보지 않을 때 바닥에 던질까봐 무서운 것은 차치해 두고서, 일단 아무렇지 않은 일인 것처럼 내밀어야지 외면 받아도 그러려니 넘길 수가 있잖아. 폭탄 돌리기처럼 허둥대지 않고 태연하게. (이쯤되면 내 MBTI가 무엇인지 이미 파악한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INFP다.) 이건 가치관의 차이인 걸까, 겁이 많고 적고의 차이인 걸까. 잘 모르겠다. (대충은 알겠지만 굳이 구구절절 풀어놓고 싶지 않단 소리다.)


    이건 굳이 따지자면 거북이보다는 고슴도치의 조심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난데없이 꺼내놓는 이야기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고 있으므로, 그 광경이 눈앞에 훤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내 문제의 근본 원인이란 대개 집안형편이 어렵고 그래서 아빠가 자살하셨고 나는 바이섹슈얼이고 에이로맨틱이고 뭐 그런 이유에 기반하는데,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 이런 이야기와 부푼 자의식은 날카로워서 필연적으로 상대를 찌르고 헤집기 마련이므로, 그리고 타인을 찌르며 고립되는 일을 나는 견딜 수 없으니까 알아서 몸을 사리는 것이다.


    내 가시가 상대를 찌르지 않을 만큼 부드러워질 때까지, 서로가 서로를 견딜 수 있게 될 때까지.




    구구절절 늘어놓았지만 나는 여전히 호구라서, 막상 그런 얼굴들, 할 말로 터져나갈 것 같은 조급한 얼굴들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고 만다. 나 개인을 감정의 배설구로 대한 그들의 태도는 분명 부당한 것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꼭 털어놓고 싶었던 거라면 내게 털어놓은 후에 후련해지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대화하는 동안만큼은 내키지 않는 마음을 숨기고 진지하게 들어주려고 노력한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게 훤히 보이기 때문에 이런 식의 무례한 고백을 자주 들은 건지도 모르겠지만...


    고슴도치식 고백법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고백법이 있을지도 모르지. 누군가에게는 그런 방식으로 서로의 패를 까 보이듯 타인을 찌르기 쉬운 말들을 먼저 내보이고 가시 없이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울지도 모르며, 그런 이들은 나보다 타인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것일지도 모른다, 고도 생각해보려 한다. 어쨌거나 나 역시 내 이야기를 풀어놓는 허들이 낮아져야 한다는 건 사실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그저 자신의 속을 후련하게 하기 위해서 함부로 고백을 뱉어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서로에 대한 감정이든 자신의 과거에 대한 토로이든. 그런 말을 주고 받은 후에야 한꺼풀 덮은 장막이 벗겨지듯 서로 손을 뻗을 수 있게 되는 일도 있겠지만, 그게 모든 경우에 해당하지는 않으니. 고백해서 혼내준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모르고 넘어가야 할 때가 있고 하고 싶어도 그냥 넘겨야 할 때가 있다. 괜찮은 순간을 붙잡지 못한다면 그냥 응어리진 마음을 부둥켜 안고 가는 수밖에 없다. 그건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은 김연수의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수록작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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