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로 찍어보면, 일어난 일은 시나리오 대본처럼 딱딱 떨어진다. 머리로 해석되는 상황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인물이 그 인물로 보이지 않고, 대사가 그 대사로 들리지 않는다.
"물 좀 줘."
라는 말 한마디를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분위기'라는 단어가 참 묘한 것이, 발화자와 청자 사이에 또 다른 차이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말하는 이는 자신의 모든 상황을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미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을 100% 다 모르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열 가지가 넘는 복합적인 마음의 결과를 '짜증 나'의 세 글자로 대체해버리는 순간이 얼마나 많던가.
듣는 이는 상대의 모든 것을 다 파악할 수 없다. 너무나도 친숙하기에 '너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라고 여기고 충고, 조언, 판단을 건넨다면 대단히 큰 실수를 범한 것이다. 또한 그 '파악했다'는 착각 이면에는 자신만의 해석이라는 여지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
상대와 자신으로 구분 지어 바라본 상황을 나와 나의 상황으로 가져와보자.
시선을 안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불편한 마음이 일어난 나에게 되물어보자. 나야, 괜찮니?
하루 동안에 우리의 마음속에는 정말 많은 불편함이 일어난다. 강도 1에서 100까지의 다채로운 불편함들이 불 지피듯 오르고, 때론 연기로 때론 불 폭탄이 되어 여기저기로 쏟아진다. 마음을 어쩌지 못해 미디어의 세상 속으로 도피하기도 하고, 눈앞의 약한 상대에게 쏟아버리기도 하며, 동등한 누군가를 향해 고함을 지르다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다가, 이불 킥 하고 씩씩거리며 잠 못 드는 밤이 보내버리기도 한다.
누군가를 향한 불 폭탄이 되어버리기 전에, 나를 다시 바라보자.
육아를 하고 있는 엄마라면, '이 정도는 참아야지. 후아.'라며 정신승리의 순간들로 채워버리고 있진 않은가.
직장생활을 하는 누군가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돈 벌기가 어디 쉽나.'라며 억울한 마음을 눌러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순간의 감정을 눌러버리고 휙 지나가는 것도 방법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의 찌꺼기가 쌓여버려 몸을 짓누르고, 마음을 억압해버린다면 그 답답함은 고스란히 해결하고픈 짐이 되어버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