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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운 풀풀 Mar 30. 2022

기혼 여성의 뒷목이 뻐근해지는 이야기

[얼어붙은 여자]를 읽다가

*글의 인용구는 [얼어붙은 여자]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에르노는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몽롱하게, 때로는 지나칠정도로 세밀하게, 기억을 길어 올린다.


읽어가며 어려웠던 부분이 옮긴이의 말을 통해 이해가 됐다.

거칠게, 몽롱하게, 세밀하게 길어 올리는 아니 에르노.

서사와 묘사와 나열이 뒤섞인 문체를 해독하듯 읽어가다, 주인공의 생각의 끝에 머물 때면 소름이 돋았다.

내가 주인공인지, 주인공이 나인지 모를 이야기.

수십 년 전 프랑스에 살고 있는 한 여성과 4차 산업혁명을 떠들어대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한 여성의 공명이라니.

서글프고 슬펐다.


심지어 가족의 자궁이 되어버린, 내 자궁에도 혐오감을 느낀다.


글은 순간을 박제시킨다.

임신이라는 고귀한 과정을 겪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해봄직한 생각.

나의 자궁인가, 가족의 자궁인가, 사회의 자궁인가.

생명이 잉태된다는 거룩한 사명 때문에 개인의 몸이 공적인 몸이 되어버리는 당혹감은 지나가는 노인분이 배를 만져보려 하는 사소한 문제에서 시작하여, 낙태가 개인의 자유인지를 논하는 거시적인 문제로 확대된다.


출산 이후는 더욱 당혹스럽다.

새 생명을 품은 귀한 대접을 받던 몸뚱이에서 양육을 위한 몸뚱이로 존재의 가치가 변화되기까지, 개인만을 위한 지점이 단 한순간도 없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귀한 대접이든 도구 대접이든 자손 번식을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차이는 없다.


내가 매몰된 곳이 바로 거기다. ... 고독. 나는 가정의 수호자, 식구들 생필품과 유지보수 담당자가 되었다. 역할 수련의 맨 마지막이 이뤄진 곳도 안시다.


역할 수련이라고 칭한다.

자아를 성취하고 가정 밖의 업무를 소화해내는 사회 구성원에서, 안정되어 보이는 가정을 꾸리고 가정 내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소화해내는 사회 구성원이 되기까지. 모든 역할 변화를 매끄럽고 자연스러우며 우아하게까지 수행해내는 '아내, 엄마'의 자리를 기쁜 마음으로 또는 저항감 없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이 모든 과정은 역할 수련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 누구에게 부여한 역할일까.

그 역할이 왜 필요한지, 그것을 누가 담당해야 하는지 최소한의 협의를 거친 것일까.

역할을 감당할 의향이 있는지 물어보았던 걸까.

내가 나에게,

그가 나에게,

사회가 나에게.


나는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 나는 끊임없이 이해해야 하는 함정에 빠지고 싶지 않다. 미소 지으며 그를 맞아주지 않았고, 뜨거운 음식을 식탁에 올리지 않았고, 골칫덩이 아이를 그의 눈에 띄게 두었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


내가 빠진 함정이자, 해결책이다.

육아휴직을 하고 있으니까, 집에서 '쉬고' 있으니까, 괜히 들쑤셔서 감정이 상해봤자 아이들만 불안할 테니까. 그를 용서하려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자, 그를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자아성찰과 내적 성장으로 노력에 의미를 부여했다. 오직 나만이 그의 책임감 없는 행동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해아만했다. '시끄러운 소동'을 피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바위에 계란을 던져봤자, 찐득한 계란 찌꺼기는 결국 내가 치워야 할 테니까.


누군가는 '그럼 그 자리에서 벗어나요.'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비워진 자리는 누가 채워줄 것인가.

흐트러진 공간은 누가 책임감 있게 정리해 줄 것인가.

육아에 필요한 손길은 누가 움직일 것인가.


'이것은 너의 몫이야'라고 지워준 업무는 아니다.

자연스럽게, 지극히 당연하게 함묵적 동의 하에 이루어진 일들이다.

아니, 동의를 한 적이 있던가.

아니, 나의 지극히 절제된 거부 의사에 누가 귀를 기울여준 적이 있던가.


조금씩 먹는 간식이 나의 패스트푸드였는데, 식탁의 의식을 상기시키는 접시도 식기도 없이 먹을 수 있고, 계획하고, 구매하고, 준비해야 하는 지긋지긋한 음식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 손으로 직접 만든 반찬은 왜 맛이 없는 건지. 나를 위한 식사를 준비하기는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복수.

나의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한 단어, 복수.

아무런 계획 없이, 생각 없이, 준비 없이, 마무리 없이 탁 뜯어 입에 밀어 넣고 쓰레기통에 집어던져버리면 되는 간편함.

'뭘 먹나'를 향한 지루한 반복에 대한 복수였다.


선생은 여자에게 정말 멋진 직업이다....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기 좋은 많은 방학, 꿈, 요컨대 주변 사람들에게 전혀 고통을 주지 않는 직업, 자아를 실현하는 여성, 돈을 번다, 훌륭한 아내이자 훌륭한 엄마로 남는다, 그러니 누가 이 직업에 대해 불평하겠는가.


나의 직업도 교사다. 초등교사다.

단 한 번도 내 직업에 만족해 본 적이 없다, 적어도 아이를 낳기 전 까지는. 원했던 직종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좁은 교실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다가(물론 보람도 크다), 텅 빈 교실과 교무실, 행정실을 바쁘게 오가며 예의 바른 웃음을 띄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는 것은 재미가 없었다. 다른 길을 꿈꾸었다.


사람들은 나의 직업을 좋아했다.

'교사라니, 시집가기 딱 좋겠다.'

젊고 예쁜 여교사는 신붓감 1위라는 그럴듯한 말들로 평가했다.

개인의 목적이 아닌, 여성이라는 사회 구성원에 적합한 직장.

그것의 의미를 아이를 낳고 나서야 더 잘 알게 되었다. 심지어 감사하기까지 했다.


한 번도 만족해본 적이 없던 직업을 휴직 6년이 끝나갈 무렵에야 만족하게 되는 모순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

직업 활동을 하지 않는데, 직업에 만족한다는 이상한 감정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여성에게 부여된, '아내, 엄마'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 직업.

개인의 만족감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사회적인 신분에 걸맞은 만족감에 지나지 않았다.


복직 후, 갈등했다.

만족할만한 직장이며, 불평이 튀어나오지 않을 직장인데.

왜 여전히 불합리함에 몸서리치며 괴로움에 눈물이 차오르는가.



내가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나의 수련 기간은 끝났다. 그 후로는 익숙해진다. ... 얼어붙은 여자. ... 쇠락이 바로 앞에 와 있다. 이미 나는 그런 얼굴이다.


쇠락이 바로 앞에 와 있는 얼어붙은 여자.

처음의 질문들은 뒤로 밀려난 채, 부여된 의무에 삶을 맞추는 여자.


여자로서의 나의 모든 이야기는 투덜거리면서 내려가는 계단의 이야기다.


쇠락한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추락이 아니다.

떠밀림도 아니다.

나의 발로 걸어 내려간다.

서서히 서서히 침몰한다.


합리적인 길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그 끝의 새로운 곳을 창조해 낸 합리적인 여성들을 웃을 테지.

층계마다 떠오르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하는 누군가는 투덜거리며 내려갈 테지.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나는 읽고 읽고, 쓰고 쓴다.


쇠락할 텐가,

추락하여 솟구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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