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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운 풀풀 Mar 30. 2022

기혼 여성의 숨겨진 물음표

[얼어붙은 여자]를 읽다가

결혼하면, 제자리를 맴돌고, 수많은 질문을 해대는 부질없는 나로부터 해방되리라 확신한다. 균형을 이루리라.... 결혼, 완성, 나는 동의한다.


결혼은 완성이라고 생각했다.

미혼인 나는 너무나도 불안정했다.


경제적으로 의지할만한 대상이 필요했다.

부모님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그들만의 인생이 있었고, 오히려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오해를 했으니까. 나의 월급은 충분하지 않았다. 대기업 초봉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급으로 나와 원가족을 부양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지 않으면, 나의 모든 경제적인 능력이 부모님에게 종속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부모님을 원망하고자 함이 아니다. 난 그렇게 착각하며 길들여졌을 뿐이다.)


정서적으로 위로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친구들은 충분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어보려하면 남자 친구를 이유삼아 우정이 소홀해지기 일쑤였다. 나에겐 어린 시절 다 채우지 못한 맹목적인 사랑을 채워줄, 나만을 향한 맹목적인 누군가가 필요했다.


육체적으로도 외로웠다.

성인이 된 여성, 식욕이 당연한 것처럼 성욕 또한 그러했다. 혼자 해결하기에는 어릴 적부터 답습되어온 '그러면 안 되는 불결한 것'이란 죄책감이 너무나도 컸다. 누군가가 필요했다.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

빈자리를 채워줄 나의 반쪽이 필요했다.

성경에서도 부모를 떠나 화합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결혼은 나에게 완성이었다.

잘 고른 사람과 결혼하면 인생은 해피엔딩으로 끝날 거라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매스컴에서 미디어에서 떠들어대는 결혼 생활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은 '지혜롭고 명석하고 매력적인' 우리 커플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을 것이라 착각했다.


이 커플 앞에서 나는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지만, 이들의 이미지가 우리의 이미지에 스며들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시부모를 통해 느꼈다.

어떤 점에서 나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다. 이는 결혼이 아니라 성취, 성공을 향해 이야기해온 그녀의 자유로운 배경 덕분이 아닐까.


나는 그녀와 다르다.


성취와 성공을 교육받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래의 남편감보다는 조금 모자라야만 했다.

'아내를 이끌어주는 지혜로운 남편감'은 내 부모님이 늘 강조했던 것이고, 나는 응당 남편보다 나의 능력이 모자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마주치는 괴리감으로 좌절했고, 난 '사랑하는' 남편을 만났다.)


게다가 난 만들어진 중산층의 쾌활한 이미지를 아주 잘 수행해내리라 생각했다. 그것이 나의 책임이자 의무라 여겼다. 성공한 여성의 삶이라 여겼다.


물론, 물음표는 지워지지 않았다.

가정에 충실하게 봉사하면서, 자아실현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거지?

의문은 결혼식을 치르고 더 깊어졌다.


... 다시 자신의 책 더미로 돌아온다, 어디까지 읽었더라? 생각하면서. 나다. 차이는 시작되었다.


두 사람이 만났다.

씻고 먹고 자는데 엄청나게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빨래는 세탁기가 돌리고, 설거지는 그때그때 하면 된다는 논리는 통하지 않았다.

어쨌든 누군가는 알아서 챙겨야 했고, 누군가는 움직여야 했다.

24시간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행동하던 두 사람이 서로의 생활의 편의를 위해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은 꽤나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었다.


익숙하지 않고, 범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도 모르는 일들 -세탁기 배수구의 물때를 청소하는 방법 같은 것들-은 '사소하지만 상당히 귀찮고 어려운 것'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심지어 사회적인 가치를 주지조차 않는 가정 살림을 다 큰 성인이 더듬더듬 배워간다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다.


게다가, 그 의무와 책임이 '일반적으로' 특정한 사람에게 지워지는 게 당연해진다면.

생활 속으로 은근하게 스며든 불평등의 냄새는 뚜껑을 열면 악취를 풍기게 마련이다.



누구도 시어머니가 다른 식으로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소설 속 시어머니는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

본인도 이전에는 교사이자 꿈이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살고 있다는 너스레를 떤다. 자연스러운 웃음으로 우아하게.

주인공은 웃지 못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랬다. 하지만 주인공과는 좀 달랐다.

가족을 위해 살고 있는 엄마가 자신만을 위한 꿈을 꾸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고, 배신이라 여겼다. 여러 가지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빠에게 순종하는 엄마가 이 시대의 현모양처라고 생각했다.

이따금 청소기를 돌리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해 주며,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결혼 후 시댁과 부딪힌 괴리감은 머릿속에 박힌 내 부모님의 모습과 시댁의 모습이 달라서였지, 여성과 남성 간의 불평등한 위치를 인지한 것은 아니었다.

시어머니를 나의 어머니에 비교했고, 시아버지를 나의 아버지에 비교했다.

단순히 어느 쪽의 문화가 더 나은지의 우월함으로 판단했다.


경험과 관습이 뒤범벅된 판단 속에서, 나사를 조이고 푸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다. 이 나사가 제대로 된 나사인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에르노, [얼어붙은 여자]를 3/4쯤 읽었다.

마지막까지 다 읽어버리려다가, 주인공이 아이를 낳기 전에 일단 간단한 글을 적어둬야 할 것 같아서 남긴다.


주인공이 성에 눈을 뜨고, 성의 모순에 휩싸이는 중반부 내용들은 너무나도 공감되었다.

프랑스 문학의 특징인지 아니 에르노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떠도는 구절들을 나열해놓은 부분들은 호흡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주목하며 읽었다.


읽으면서도 자꾸 솟아오르는 몇몇 질문이 있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부모를 미화하고 있는 건 아닌가.

아니 에로노는 중산층에 적응하지 못한 야망 있는 서민층이 아닌가.

중산층의 야망은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가, 그들의 성에 따른 관습들은 어떻게 전수되는가.

평등화되었다는 지금의 사회에서도 여성을 향한 '책임과 의무의 시선'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이는 서민층과 중산층, 부유층에서는 어떻게 다른 형태를 띠고 있는가.

각 계층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문제는 어떤 것이 있는가.

사회에 드러난 문제들은 주로 어느 계층의 것들인가.

사회를 계층으로 나누어본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가슴 아프지만, 이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결국,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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