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유로운 풀풀 May 04. 2022

어린이날이 이제 필요 없다고요?

 어린이날이 다가왔다.

 코앞으로 다가온 어린이날. 여섯 살 두 딸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는 운동장에 에어바운스를 설치한 행사가 이루어진다. 지금 내 책상 한 쪽에는 반 아이들에게 나눠 줄 작은 선물이 쌓여있다. 단체 채팅방에서는 지역별로 진행되는 각종 어린이날 행사 관련 정보가 쏟아진다.


 '아이들과 어린이날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며 포털 창에 '어린이날'을 검색해보았다. 생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물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아, 함께 나들이를 갈만한 장소를 찾던 중이었다. 포스팅과 기사를 클릭하여 읽어가던 중 댓글 하나를 마주했다.


'어린이날, 이제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이미 애들에게 좋은 것들로 차고 넘치게 주잖아요.'


 일부는 맞는 말이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아이들은 귀한 대접을 받으며 자라고 있다. 물질적으로 풍족한 세대다. 오죽하면 식스포켓이라는 말이 나올까. 아이들을 함부로 혼내지도 않는다. 식당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해도 '아이 기 죽인다'며 훈육을 조심하는 부모들도 있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어린이날이라 하면 '특별히 소외된 계층'에만 집중하여 다룬다.


 하지만, 깊게 들여다보면
'어린이날이 필요 없다는 말'의 일부는
틀린 말이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아이들은 여전히 방치 아니면 억압의 형태로 '안전한 자율권'을 무시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나부터도 그렇다.

 아침 시간, 시원하게 일어나지 않는 아이를 향해 '오늘 또 늑장이지.'라고 말하진 않았나. 입을 옷을 빨리 고르지 못해 서랍 안의 옷을 만지작 거리는 아이를 향해 '그만 좀 골라.'라고 쏘아붙이진 않았나. 식탁 의자에 앉아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는 아이를 향해 '고사 지내? 밥 얼른 먹어.'라고 하진 않았나. 신발 속에 발을 천천히 밀어 넣는 아이를 향해 '빨리 좀 신어. 너 때문에 맨날 지각이야.'라고 말하진 않았나.


 슬프게도, 이 글을 쓰는 내가 오늘 아침 이를 향해 내뱉고 싶었던 말들이다. 무심결에 내뱉기도 했고, 무언의 제스처로 내지르기도 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키며 침묵으로 응대했다.


 시원하게 일어나지 않는 아이를 보며, '내일은 나부터 30분 일찍 일어나야지.'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서랍 안의 옷을 만지작 거리는 아이를 향해, '옷 얼른 고르자. 시간이 촉박하니 엄마 마음이 급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 아침을 먹지 않는 아이를 향해, '한 숟가락 먹자. 힘내서 신나게 놀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얼른 신발을 신지 않는 아이에게 '시간이 다 됐다. 엄마 먼저 문 밖에서 기다릴게.'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엄마인 내 마음이 조급하다고, 피곤하다고, 화가 났을 뿐이다. 모든 불쾌감의 이유를 아이의 특정 행동에 갖다 붙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신의 입장과 감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미숙한 아이를 향해 '그것 봐, 엄마 말이 맞지.'라며 폭력적인 언행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폭력은 신체적 폭행이나 거친 욕설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어른들 사이에서도 명예훼손이라는 법적인 죄가 분명히 존재하지 않은가. 신체적인 접촉이 아니더라도 상대에게 불쾌감을 준다면 성범죄에 해당되지 않는가. 자신의 입장을 논리 정연하게 말하는 법을 배우고 숙지했다고 생각되는 어른들 사이에서도 서로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법적인 장치들이 존재하는데, 하물며 아이들은 어떻겠는가.


물론, 여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완벽한 부모는 없다.


 제아무리 육아 전문가라고 해도 본인의 자식을 키울 때는 아는 데로 100%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부모다. 우린 AI 로봇이 아닌 감정을 가진 사람이지 않은가. 자녀를 양육하며 요동치는 마음을 늘 평온하게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장담하건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보내는 일주일의 생활 중 단 한 번이라도 부모 자신의 언행에 물음표를 던져보지 않았다면, 조금은 의문을 가져 볼 필요가 있다. 죄책감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말하는 것이 더 좋았을까?',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와 같은 질문들을 통해 자책이 아닌 개선으로 방향을 틀어보자는 의미다.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자녀와의 대화, 자녀 교육 관련 책을
한 페이지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읽어보고 생각해보는 거다. 아이에게 건넨 말 중 서로를 존중하는 말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아이를 보며 떠오른 생각들 중 무심코 '아이 탓'으로 미뤄버린 것들은 없는지. 생활의 리듬에서 부모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했던 행동은 없는지.


 '부모의 피로함'과 '자녀의 표현력과 감정 조절의 미숙함'으로 자칫하면 묵살당하기 쉬운 아이들의 맥락. 부모의 감정이 극에 달하기 전에 아이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 보는 귀한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부모에게도 아이에게도, 그 어떤 선물보다 귀한 보물이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목표 도달 시점을 조절하는 육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