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책이 세상에 나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그리고 공저 모임을 시작했다.
첫 책의 초고를 쓰고 퇴고를 거치는 7개월의 시간 동안 '독자'를 위한 글쓰기에 집중했다. '독자'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독자'에게 그 말을 어떻게 잘 전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쓰고 고쳤다. 타인을 위한 글쓰기를 훈련한 셈이다.
출간 이후 한 달간은 '책'을 위한 글쓰기에 집중했다. 출간 소식, 책 리뷰, 북토크 모임 등 '책'이 어떤 사람들과 만나고 있고,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는지를 기록했다. 책을 위한 글쓰기를 맛본 셈이다.
독자를 위한 글이든, 책을 위한 글이든 초보작가는 실수하기 마련이다. 모르는 것 투성이었고, 배워야 했고, 실천해야 했다. 그게 독자와 책을 향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8개월이 조금 넘는 시간을 달리고 나니 '나'를 위한 글쓰기를 잊어버렸다. 공저 모임을 시작하고 초고를 쓰려는데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어디서부터 글을 풀어내야 할지 한 문장도 쓸 수가 없었다.
쓰기의 감각을 잃어버린 셈이다.
정보를 전달하는 글은 숭구리당당 숭당당을 외치며 후루룩 쓰기 쉬웠다. 블로그 포스팅은 어떤 내용을 적을지 구상만 해두면 쓰는 건 후다닥이다. 하지만 내 마음을 적어 내려 가는 브런치와 첫 마음을 기록하는 초고에는 물음표만 떴다.
어떡하나 고민만 하다가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서 브런치에 주절주절 타이핑을 했다. 쓰고 발행해도 그만, 작가의 서랍 속에 보관해도 그만이니 부담이 없다. 쓰고 싶은 한 문장만 떠올리며 이야기를 펼쳐내니 하나의 글이 완성되었다. 완성도는 따지지 않고 일단 발행을 누르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독자를 고려하여 문장을 예리하게 다듬는 과정이 없는 초고 발행이지만 쓰기의 부담감을 덜어내고, 쓰기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탁월한 처방이다.
그렇게 이틀간 브런치를 이용하여 감각을 되찾으니, 공저의 초고 첫 꼭지도 후다닥 써버리고 싶었다. 어차피 고칠 초고, 글이 나와야 고치든 버리든 할 테니 주절주절 쓰고 보면 뭐가 나올 거란 생각이었다.
한글 파일을 열어 저장부터 눌렀다.
공저-챕터 1-꼭지 1
한 문장도 쓰지 않은 파일이지만, 파일 이름부터 정하고 나니 한 단계 올라 선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같은 파일을 열어 제목인지 주제문장인지 주절거림일지 모를 문장을 썼다. 다시 저장을 누르고 묵혀두려다가 퍼뜩 떠오르는 상황이 있어 후루룩 쓰기 시작했다. 맞춤법, 맥락 따지지 않고 일단 무조건 적기. 적다가 생각이 끊기면 읽어보며 천천히 고치기. 40 꼭지를 다 채워야 하는 부담이 없는 공저모임인지라 더욱 마음이 가벼웠다. 아직 초고의 상태라 나를 위한 글인지 독자를 위한 글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모호함이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실용서적이 아니라 에세이 형식을 취할 원고이니 괜찮다며 다독였다. 나를 감동시키고 나서, 객관적으로 글을 분석해야 타인의 마음에 닿을 글로 고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이다.
몇 달간 '내 밖의 것' 위한 무언가를 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내가 아닌 다른 것'을 위한 무언가는 생산적인 활동임과 동시에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작업이다. 내 우물의 물을 길어 올려 멋진 수족관에 물을 채우고 나니 내 우물에 물이 텅 비었다. 다시 내 우물에 물이 차오를 시간, 비가 내릴 시간, 옆으로 아래로 파내려 갈 시간이 필요했다.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마음껏 쓰는 글을 쓰고 나니 내 우물이 채워짐이 느껴진다. 읽으며 넓히고, 쓰며 파내려 가는 그 시간이 다시 시작되었다.
생산적인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고 고민하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선 에너지가 필요해요.
당신의 에너지를 채우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조금은 이기적인 듯하고,
조금은 어리석어 보이고,
조금은 느린 듯해도
생산성을 고민하는 시간에 에너지를 채우는데 집중하면 새로운 물길이 트인다.
나의 능력이 부족해서 생산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나를 돌보는 시간이 부족해서 에너지가 고갈된 걸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