챙기셨나요, 반창고?

by 자유로운 풀풀

두 딸아이를 어린이집에 들여보내고, 기분 좋게 뒤돌아섰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 단지 내에서 종종 마주치며 인사 나누던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손주 준이가 오늘따라 할아버지랑 더 놀고 싶다고 칭얼대는 중이었다.


"괜찮다, 괜찮다. 내가 저쪽에 가서 기분 좋게 달래고 올게."


할아버지가 손주를 안고 어린이집 화단 앞으로 걸어갔다.


"준아, 할아버지가 있다가 빨리 데리러 올게. 선생님이랑 재미나게 놀고 있어."


할아버지 품에 안긴 준이의 눈빛이 진정되어 보였다. 할아버지는 손주를 꼭 안고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짧은 헤어짐이라도 아쉬운 준이의 마음이 할아버지의 품 안에서 사르르 녹아드는 순간이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돌아서는데, 마음이 울컥했다. 할아버지랑 더 있고 싶은 손주의 마음을 '괜찮다'로 받아들이고 다독이는 사랑에 눈물이 났다. 내가 듣고 싶었던 그 말에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난 잘하고 싶었다.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성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칭찬받고 싶었다. '잘했다, 잘했어.'의 칭찬을 받으면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인생은 뜻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의지와 달리 몸이 움직여지지 않을 때도 있다. 몸은 움직여지지만 마음이 동하지 않을 때도 있다. 마음, 몸, 의지의 3박자가 갖추어져 뭔가를 시도했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을 때도 있다. 세워둔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경우는 셀 수 없이 많고, 시나리오대로 흘러간 일들은 손가락에 꼽힌다. 그 시나리오 또한, 최고가 아니라 '적어도 이만큼은'이라는 최하위의 기준이었을 때 말이다.


삶은 희망차게 굴러가지 않는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굳이 구분 짓지 않으련다. 기대하는 마음은 '유토피아'고, 좌절하는 마음은 '디스토피아'니까. 기대와 좌절이 적절히 섞여 굴러가는 것이 삶이다. '이것만으로도 살겠다'라며 희락을 맛보다 가도, '대체 왜 이러는 거냐'며 분노에 휩싸이기도 한다. 동전 뒤집기보다 더 쉬운 것이 마음 뒤집기다. 무언가가 이루어져서 유토피아가 펼쳐지다가도, 이루어진 일 때문에 디스토피아가 펼쳐지기도 한다.




할아버지 품에 안겨있던 준이.

준이는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유토피아'를 꿈꿨다. 쾌적한 집에서 할아버지와 블록을 쌓고, 살을 부대끼며 깔깔거리는 하루. 준이 앞에 닥친 현실은 어린이집이다. '유토피아'가 스러지자, '디스토피아'가 세워졌다. 단순히 어린이집을 가고 싶지 않음이 아니다. 할아버지와 놀고 싶은 욕구가 좌절되자, 속상한 마음에 '디스토피아'가 펼쳐진 것이다. 준이에게 필요한 것은 반창고였다. 디스토피아를 허물고, 새로운 유토피아를 세워 줄 '마음의 반창고'.


괜찮다, 괜찮다.



준이의 마음에 반창고가 붙여지는 순간이다. 헤어지기 싫은 준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다독이는 할아버지의 목소리. 주변의 불안한 시선을 잠재우는 토닥거림.


"내가 가서 달래고 올게. 기분 좋게 들어가야지."

준이의 마음에 디스토피아가 스러졌다.


"할아버지가 빨리 데리러 올게. 있다가 재미나게 놀자."

준이의 마음에 유토피아가 세워졌다.




누구나 잘 해내고 싶고, 좋은 피드백을 받고 싶고, 성공을 하고 싶다. 굳이 성공이라 이름 붙이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정해진 루틴을 잘 수행해내고 자신감을 채우고 싶다. 하지만 뜻처럼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나도 아는데, 아는 데로 되지가 않고, 하고 싶지도 않아!"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어떻게 하면 되는 건지도 알지만, 도무지 몸과 마음이 머리를 따라가지 않는 거다. 몸도 마음도 돌멩이처럼 굳어버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발버둥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다.



괜찮다, 괜찮다. 그럴 수도 있다.


이럴 때 누군가가 다가와, 내 등을 쓸어내리며 이렇게 말해준다면. 굳어버린 마음을 순식간에 눈물로 녹여내어 줄 수 있다면. 희망과 좌절 사이 어느 지점에서 중심을 잡고 일어설 수 있지 않을까? 머리와 마음 사이의 막혀버린 어느 지점이 뚫리고, 일어서서 걸어갈 또 다른 길이 보이지 않을까?


할아버지 품에 안겨 마음의 반창고를 붙인 준이. 우리에게도 마음의 반창고가 필요하다. 지금 당장 해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세우기 전에, '그럴 수도 있다'는 반창고가 필요하다.


마음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마음은 마음일 뿐이다.

내 마음의 반창고를 챙기는 하루가 되기를.

나도, 그리고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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