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육에서 질문은 좌표가 된다

시킬까 말까, 할까 말까의 기로에서

by 자유로운 풀풀

취학 전 엄마들이 모이면 교육 이야기는 뜨거운 감자다. 초등 입학 이후에야 하루 두장 학습지 같은 과제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학교도 가지 않은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시킨다는 것은 찬반이 분명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엄마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이것저것 시키는 엄마.

"그래도 한글은 떼고, 연산은 좀 하고 들어가야지. 엄마가 어느 정도는 잡아줘야 돼."


애가 좋아하니까 해주는 거라는 엄마.

"우리 애는 학습지를 좋아하더라고. 좋아하길래 그냥 사 준거야."


자연스럽게 크는 게 중요하다며 아무것도 안 시킨다는 엄마.

"알아서 다 할 거야, 다들 뭘 그리 조바심을 내.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면 돼."


그 엄마는 정말 과한 교육을 시키는 것일까?

그 엄마는 정말 아이가 좋아하는 것만 시키는 것일까?

그 엄마는 정말 어떠한 교육도 하지 않는 것일까?


정답은 없다. 맞고 틀리고 가 없는 문제다. 아이의 엄마인 내가 하고픈대로 가는 것이 나만의 육아의 길인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던져 볼 몇 가지 질문이 있다. 누구에게도 아닌 자신에게 물어야 할 이야기.




내가 이것저것 시키는 엄마라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이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엄마들은 '아이를 위해서' 어떠한 행동을 한다. 바른 식습관을 위해서 집밥을 준비하고,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위해서 취침시간을 조종하며, 올바른 독서 습관을 위해서 책을 읽어준다. 우린 그 모든 것들을 단지 '아이를 위해서'라고만 생각한다. 아이를 위한 것이기에 이것만은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 나에게 다시 질문해보자.

"이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만약 이것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나는 무엇이 걱정되는가."


해야만 하는 것들, 취학 전에 반드시 알고 가야 할 것 같은 것들은 엄마의 마음에 조바심을 일으킨다. 그래서 역할놀이에 심취한 아이를 보는 엄마의 마음이 '사회성을 기르고 있구나 vs 저렇게 놀다 한글 공부는 언제 하나'로 갈팡질팡 하는 것이다. 갈팡질팡하는 마음의 저변에는 두려움이 있다. 남들 다 하는데, 우리 아이만 안 하는 느낌. 이렇게 넋 놓고 있다가 내 아이만 뒤쳐질 것 같은 느낌.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나의 액션들을 설명하기 전에, 이 마음들을 먼저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내 아이가 지금 당장 한글을 줄줄 읽어낸다고 해서 12년 뒤 수능 언어영역에서 만점을 받을 것이라는 게 사실인가?

내 아이가 지금 당장 한글을 줄줄 읽지 못한다고 해서 12년 뒤 수능 언어영역에서 최하등급을 받는다는 게 사실인가?

내 아이가 지금 당장 수 연산을 줄줄 해낸다고 해서 12년 뒤 명문대를 진학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내 아이가 지금 당장 1-10의 가르기와 모으기를 하지 못한다고 해서 12년 뒤에 수포자가 된다는 것이 사실인가?


지금 당장 이것저것 시키는 것도 좋다.

하지만 이것들이 먼 미래, 5년 뒤 10년 뒤의 뚜렷한 결과를 보장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는 버렸으면 한다.

A를 해주었으니, A'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는 순간 '아이를 위한다는 사랑'이 아이의 마음을 놓치게 되는 시작이 될 수 있으니.


그럼 기대도 없이 막 하란 말이냐, 이 답답한 작가 양반아?

사람인데 어찌 기대를 다 버릴 수 있겠는가. '내가 이런 기대를 가졌었구나.'하고 알아차리면 된다. '널 위해서'라는 화사한 포장지를 거둬낸 날것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아이와의 관계는 별 탈 없이 순조로울 테니.




애가 좋아하니까 해주는 엄마라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내가 의도한 것은 무엇인가.


이런 엄마들은 자신의 의도를 놓치기 쉽다. 물론 의도와 목적 따위야 없어도 된다. 하고 싶은 대로 했더니, 결과까지 좋으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하지만, 애가 좋아하니까 태어난 지 한 달 된 아이에게 막대사탕을 물리는 엄마는 없다. 마찬가지로 3살 된 아이에게 자극적인 만화를 보여주기 전에 한글 카드로 놀아주기를 선택한 것도 나이고, 5살 된 아이에게 게임을 쥐어주기 전에 바둑돌로 알까기를 선택한 것도 나인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아이에게 주고 싶은 환경'이라는 의도가 있다. 이것저것 시키는 엄마들처럼 드러나는 학습적인 것을 하지 않았을 뿐, 교육적인 의도가 가미된 것들로 놀이를 진행했을 뿐인 것이다.


그러니, 애가 학습지를 좋아해서 시켰다는 엄마들이여. 조금만 더 솔직하게 말해보자.

내 기준에 좋은 것을 '아이가 좋아할 만하도록 만들어서' 주고 싶었다고. 그런 노력을 좀 했다고.


뭘 그리 굳이 솔직하게 다 말해야 하냐고? 안 해도 된다. 그런데 의도 없이 했다는 말들이 두꺼운 껍질이 되어버리면, '내 기준에 좋은 것을 아이에게 강요하고 있는 엄마'가 되어버릴 수도 있고, '아이가 좋아하는 것만 무작정 따라가는 아이보다 아이 같은 엄마'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고, 나의 무의식적인 의도와 의식적인 행동을 균형감 있게 살펴보는 태도. 이것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안 시키려는 엄마라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아이가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 암묵적으로 배워갈 것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시키지 않는 자율성을 강조하는 엄마들은 아이가 발달상 배워야 할 것들을 놓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언어적으로 폭발하는 시기에 적절한 자극을 주지 않는다면, 아이는 해당 과업을 더 늦은 나이에 배워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물론 그러한 결핍들이야 부모의 노력과 아이의 빛남으로 다시 채워갈 수 있지만, 시기를 놓쳤을 때 아이가 겪을 불편함과 어려움들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아무것도 시키지 않는다고 해서 아이가 아무것도 배워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집에서 건강식을 즐긴다면 아이는 건강식을 배우는 것이고, 부모가 운동을 즐긴다면 아이는 운동의 즐거움을 자연스레 습득하는 것이다. 아이는 부모의 말과 행동을 통해 배울 것을 배운다. 걱정되는 것은, 부모가 가르칠 의도가 없었던 것들까지도 아이가 배워간다는 것이다. 부모의 무의식적인 습관들, 이를테면 잠자기 전 스마트폰 게임을 즐긴다던가, 과자나 빵으로 끼니를 때운다든가 하는 것들까지도 아이는 흡수한다.


그러니, 내가 아무것도 안 시키는 엄마라면 '아이가 발달상 어떤 시기에 있는지, 아이에게 필요한 자극은 무엇인지,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실천할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매일 꾸준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의 정서적, 지적 자극을 위한 '의도를 가진 어떠한 행동'을 조금씩 알아가고 노력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은 나 또한 이 세 부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양육하며 오가는 감정들로 여러 가지 과정들을 겪었다. 처음에는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며 아무것도 안 시키는 엄마'였다가, '아이가 좋아하니까 해준다며 아이를 졸졸 따라가는 엄마'가 되었고, '조바심과 기대로 이것저것 시켜보려는 엄마'가 되려고 노력했다.


이제는 나 자신에게 조금 더 솔직해져야겠다.

'아이를 위해서, 아이가 좋아하니까, 아이가 행복해야 하니까'의 그럴싸한 포장지로 나의 욕망을 숨기지 않아야겠다. 엄마의 기대를 감춘 '너를 위해서'라는 말은 거두기로 했다. 100% 완벽하게는 되지 않더라도 노력을 해보아야겠다. '엄마가 걱정되니까, 엄마 생각에는 이것이 필요하니까, 엄마는 이게 중요하니까'로 나의 말들을 바꾸어야겠다. 엄마와 아이의 입장을 분리시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가야겠다. 내가 무조건 맞지도, 아이가 무조건 맞지도 않은 두 사람 사이의 중간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 일상. 그것을 꾸리는 거다.


어떤 양육방식을 취하든 그건 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옳고 그름은 없다. 각자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서로 다른 색깔로 인생은 더욱 풍요롭게 비칠 테니까.


다만, 부모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그 한 번의 질문이 지금 내가 서 있는 좌표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지점이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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