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남편과 수다를 떨었다. 다음 주에 1박 2일간 머무를 숙소를 선택하기 위해서였다.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집과 30분 거리의 리조트들 중 한 군데를 예약하기로 했다. 몇 개의 후보군 중에서 이런저런 조건들을 맞추어 보았다. 마침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키즈룸이 선정되었다. 숙소 근처에 관광지도 많고, 워터파크까지 있으니 금상첨화의 조건이었다. 사람이 많을 경우에는, 리조트 내의 키즈카페를 가기로 했다. 몇 시쯤 출발하여, 어디를 가고, 식사는 어떻게 해결할지를 이야기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계는 자정을 훌쩍 넘었다.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 황금 같은 육퇴 후의 시간을 노동의 연장선에서 머무른 느낌이랄까! 분명히 퇴근했는데, 집에 와서 다음 주 업무를 미리 예습한 기분이랄까!
퇴근을 했으면 여가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30분 이내로 집안일과 육아를 후루룩 해치우고, 날 위한 무언가를 했어야 했다. 육아서를 읽든, 자기 계발서를 읽든 어떤 것이든 손에 쥐고 새로운 문장을 만났어야 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미뤄두었던 강의를 들으며 내 속의 무언가를 채워야만 했다. 하다못해 스트레칭이라도 하면서 뭉친 근육을 풀어주었어야 했다.
그런데 수다라니! 그것도, 업무와 연장선에 있는 숙소 예약이라니!
하아, 너무 억울했다. 그깟 숙소 예약쯤이야 남편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아이들이 깨어 있을 때,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때 노트북을 켜서 이런저런 조건들을 살펴보며 고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노동시간 내에서는 (남편이) 드러누워 잠을 자다가, 하루 업무를 끝내고 녹초가 된 나에게 숙소 예약을 함께 의논하다니! 이건, 업무 떠넘김이었다!
남편은 한 달 전부터 숙소를 알아보았다. 어디가 좋을까, 어떤 장소가 좋을까 고민하고 들여다보았다. 그런 신중함이 마음에 들기도 하지만, 문제는 신중함이 지나친 나머지 결정이 늦어진다는 거다. 뭐든 빨리빨리 결정 내리고 해치우는 나와 다르다. 나였다면 이틀 만에 결정 내렸을 일을 한 달 동안 고민하고 알아보다가, 결국 나와 상의하여 결정했다. 그것도 육퇴 후의 황금 시간을 두 시간이나 써먹으면서.
하아. 안타깝게도 우리 집은 노트북이 한 대다. 남편이 노트북을 붙들고 있지 않았으면 난 글을 썼을 거다. 필사라도 했을 거다. 포스팅이라도 했을 거다. 아까운 내 시간을 돌리도~!
"나 화가 나. 이렇게 시간을 날려먹었어. 글도 못쓰고 책도 못 읽었어. 나 어떡해!"
"남편이랑 즐겁게 수다 떨면서, 숙소도 예약했잖아. 못 쓴 건 내일 쓰면 되지."
"그게 아냐. 떠올랐을 때 써야 타라락 나온다고. 아, 속상해."
"내일은 내일 글감이 또 떠오를 거야. 오늘은 재미난 시간 보냈으니 잘한 거야."
다독이는 남편의 말에도 '당신은 여유시간이 많으니까 그렇지!'란 뾰족한 마음이었다.
육퇴 후 혼자만의 시간.
소란했던 거실 풍경 위로 어둠이 내리고, 밤의 소리만 울리는 시간. 홀로 남은 그 순간을 즐긴다. 읽고 싶었던 책을 읽고, 듣고 싶었던 노래나 강의를 들으며 허한 마음을 달랜다. 글쓰기를 통해 하루 동안 껴입은 껍질들을 벗겨낸다.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을 가지고 나면, 내일을 향한 다짐으로 하루가 마무리된다. 달콤한 잠을 줄이면서까지도 여유시간을 확보한다. 맑은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내기 위함이다.
내겐 하루 중 홀로만 떨어진 시간이 필요하다.
외로운 섬처럼 나를 고립시키고, 나만의 고치 속에 들어가는 것은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다. 감정에 흠뻑 빠지기도 하고, 이성의 날을 곤두세우기도 하며 나를 알아간다.
아이들과 사람들과 이리저리 보낸 하루. 일들에 휩쓸려, 생각조차 미루고, 감정들조차 제대로 주워 담지 못한 날들이 있다.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고, 어떠한지도 모른 채 커져버린 감정 덩어리에 짓눌려 존재가 사라질 것 같은 기분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그런 하루들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나는 스러진다.
어떤 이들에겐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침잠이 필요하다.
깊이 가라앉아 스스로에게 몰입하고 나면 에너지가 솟는다.
아니, 에너지를 가로막던 거추장스러운 가면들을 내려놓고 나면 다시금 나의 모습으로 살아갈 힘을 알게 되는 것이다.
결국 어제는 어떻게 되었냐고?
글도 쓰지 않고, 책도 읽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잠들었다. '사랑하는 남편과 재미나게 보낼 1박 2일을 이야기했으니, 잘 쉰 거'라던 남편의 말을 받아들였다. '해야 할 것 같은 일들을 날려버리고, 의미 없는 수다로 설레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라는 받아들이기 힘든 깨달음을 쉬이 받아들인 것이다. 남편에게 뽀뽀를 날리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