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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연 Oct 14. 2022

허무주의에 '낙관적' 눈알 붙이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다정함

 어차피 이 모든건 끝나기 마련인데, 왜 살아야 할까.


 오늘도 출근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퇴근하면 그걸로 충분할까. 정해진 날짜마다 들어오는 급여로 대출 이자를 갚고 적금을 낸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금전적인 불안은 잠깐 해결했다. 그런데 그걸로 충분할까. 간혹 힘든 상황을 직면하면 과거의 선택지를 떠올려보곤 한다. 내가 만약 수능을 좀 더 잘 치렀다면, 그 때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집을 떠나면서 가족들에게 모진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 때 그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 때 다른 선택을 했었다면 지금은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을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는 멀티버스 라는 도구를 활용해 사람들이 한 번쯤은 했을 상상을 난삽하게 표현한다. 다중차원은 과거의 내가 다른 선택을 했을 때 뻗어나간다. 다른 차원에서 나는 유명한 배우이고, 유명한 셰프이며, 쿵푸 마스터다. <에에올>은 멀티버스라는 상상 속에서 우리는everything, 무엇이든 될 수 있고 everywhere,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중차원의 또다른 나를 모두 체험하게 된다면 그 다음엔 무엇이 있을까. 어차피 수명이 다하면 이 모든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화는 또다른 선택지를 모두 상상하고 그것에 감동해봤자 결국은 이 모든게 통계학적인 필연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한다. 멀티버스로 은유된 삶의 가능성도 어차피 반복된 일상을 피할 수 없다. 결국엔 이 모든게 뻔하고 무의미한 것들이다. 어차피 다른 선택을 해봤자 삶은 매일 돌아가는 세탁기처럼, 시커먼 베이글처럼, 동그랗고 거대한 쳇바퀴를 굴리는 것과 다르지 않을 테니까.




영화 속 멀티버스는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또 다른 나의 가능성의 은유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은 우주의 티끌만도 못한 작은 존재라는걸 깨달았고, SNS는 타인의 보정된 삶을 관찰하게 하면서 내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게 정말 한정적이라는걸 체감시킨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팽창하는 세계에서 개인은 아주 초라한 존재임을 깨닫고 좌절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만성 우울에 시달리며 삶의 주체성을 놓는다. 체념하고 막나가며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허무주의를 오독하고 스스로를 절벽으로 몰아세우는 것이다. 현세대를 상징하는 조이(스테파니 수)는 허무주의에 의탁하고 부모 세대도 여기에 동참할 것을 원한다.


 <에에올>에는 소위 '천박한 화장실유머' 가 많다. 그리고 그것으로 멀티버스의 능력들을 최대한 멋있지 않게끔 표현한다. 사실 이런 천박함은 우리의 삶과 가장 맞닿아있다. 우리는 항상 다수의 인정을 원하고 품위를 지키는 사회적 동물의 태도를 유지하려고 들지만 그건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어렵다. 악하고 광활한 세계가 그렇게 놔두질 않는다. 그래서 영화가 유머를 다루는 태도야말로 우리의 삶의 형태와 가장 근접해 있다. 우리는 그리 고결하지 않다. 영화는 사회적 지탄을 받고 천대시하는 괴상한 행동을 우리가 품고 있던 삶의 또다른 가능성을 끄집어내는 버튼처럼 활용한다. 기발한 설정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단어가 연상되었다. 크리에이터집단 '쿠르츠게작트'에서 처음 접했던 Optimistic Nihilism, '낙관적 허무주의'라는 말이 있다. 어차피 죽으면 모든게 끝이 날 텐데 굳이 왜 살아야만 할까,라는 질문에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건 우리가 결정할 수 있다




 그저 능동적 허무주의를 다르게 표현한거 아닌가 싶은 이 말은 우리가 도달할 죽음이라는 허무를 인정하고 한 번 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이니 더욱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에에올>은 여기에 단어 하나를 첨부한다. 세상을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건 멀티버스의 나로부터 얻은 뛰어난 능력이 아니라, 타인의 불안을 헤아릴 수 있는 다정함이라는걸.




현시대에 필요한건 타인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아닌, 타인의 상냥함을 발견할 수 있는 다정함이다.





 이 영화는 현시대의 분열과 혐오, 세대간 불통을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절대적 진리가 없는 세계에서 불안해하는 자들을 헤아리면서 우리가 싸울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나와 다른 존재와 싸워 이기는게 아니라, 그들의 결핍을 들여다보고 안아줘야 한다. 불통의 세계에서 소통을 간절히 바라는 이 다정한 영화는 허무주의에 의탁하는 사람들을 힘껏 껴안는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문제의식을 재단하는 사람보다 나의 아픔을 헤아리는 다정한 사람을 더 좋아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다정하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주길 바란다. 다정함이 결과적으로 나의 고민을 해결해주지 못해도 괜찮다. 영화는 결코 세상을 구원하지 못한다. 다만 당신의 고단함을 알아채고 꽉 안아줄 뿐이다.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당신이 지금 여기에 있는건, 당신 곁에 있는 사랑하는 존재들을 지키고 싶어서라는걸 잘 알고 있으니까. 허무주의에 낙관이라는 작은 눈알을 붙여주는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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