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함
* 몇 가지 메모를 연결하여 써내려간 글입니다.
불혹이라는 인생의 전환점에서 이제까지 달려온 여정을 돌이켜 보면, 대부분의 상황을 내 노력에 의해 통제할 수 있다는 커다란 망상을 지니고 살았던 것 같다.
공부든 악기 연주든 웨이트 트레이닝이든 긴 시간에 걸친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런 망상이 더 강화됐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내가 꿈꾸던 것 중 일부는 내 능력을 최대로 동원한다 해도 닿을 수 없는 지점에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예를 들어 유학이라든지.
하지만 여전히 내 의지와 노력으로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망상이 지속되고 있다. 시간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한가? 태어남과 죽음은 내 통제의 범위 밖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을 통제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한 미션이다.
개인 경험을 일반화해 보자면, 시간 통제의 강박은 아마 오늘을 사는 사람이라면 조금씩은 갖게 마련인 그런 고질병이 아닐까 싶다. 시간을 통제하려는 목적은 주어진 삶을 조금 더 풍요롭게 살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되지만 역설적이게도 삶의 질을 더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불확실성이 효율적인 시간 통제 노력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확실성은 자연의 본질적인 속성 중 하나이다. 비근한 예로, 2020년 1월로 돌아가보자. 몇 주 뒤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전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을 야기하고 이전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돼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그 누가 알았을까.
삶은 예측 불가능하고 불확실하다.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삶을 통제하고 특히 시간을 통제하려 하면 불확실성의 사소한 침입에도 취약해질 뿐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시간을 운용하는 주체가 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내가 속한 장소와 역사적 시점에 대한 응답을 하는 주체가 나라는 데로 인식이 변화돼야 한다. 세상의 중심에 서서 나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부름에 답하는 수많은 주체 중 하나로서 나를 인식하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를 삶에서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는 좀 더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여전히 34개월 아들과 싸우며 낮은 정신연령을 자랑하는 40대의 초입에서 내가 맞닥뜨린 화두이다.
내가 이 장소와 이 역사적 시점에 위치해 있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다르게 약간 다르게 질문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을까? 추상적인 질문이긴 하지만 최소한 집에서 만3세 아들에게 욱하는 그런 행동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
이어지는 생각)
내가 속한 상황과 시점의 '부름'이 무엇인지 즉각적으로 알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고작해야 사후적으로 돌아봤을 때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그 부름을 인식했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상황의 가변성과 불확실성이 클 때는 그 부름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과연 추후에도 적절할까 라는 회의를 갖기 쉽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최선은 그 행위가 혹은 그 목적이나 목표가 나에게 충족감을 주는지 판단하여 YES면 직진하고 NO면 대안을 모색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하나 더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부분은 과연 이 행위나 목적/목표가 타인에게도 이로운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이다. 최소한 가족에게 이로워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대안을 찾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너무 복잡하고 막연하게 느껴지고 여전히 나는 내 삶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나에게도 남에게도 이로운 유일한 행동일 수 있다.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뭘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면 일단 일찍 일어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