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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송인 Oct 05. 2019

조현병: '정서의 둔마'에서 '감정 표현의 감소'로

정신과에서 진단 기준에 관한 편람으로 주로 사용되는 DSM 진단 체계는 시대의 흐름과 연구 결과의 축적에 따라 변화를 거듭해 왔고 현재 5판까지 나온 상태입니다. 4판에서 5판으로 넘어오면서 조현병 진단 기준이 달라진 부분 중 눈에 띄는 것은 4판에 있던 조현병의 세부 유형들, 이를 테면 편집형(paranoid type), 와해형(disorganized type, 해체형이라고도 부릅니다) 등 조현병의 아형(subtype)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이론적인 혹은 통계적인 기반에 의해 정립되었다기보다 조현병을 정의내리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임상가들의 임의적인 구분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전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크레펠린이나 Bleuler 등이 조현병의 아형을 정립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습니다.(참조 1) 대가가 그렇다고 하면 사실 후학들은 그 말을 따르게 되기 쉽고, 그래서 이러한 구분이 명맥을 이어 온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거의 백 년 전에 세워진 이러한 아형 분류가 타당한지 검증해 보려는 시도가 많았고, 결과적으로 조현병의 실제 현상과 잘 맞지 않는다고 판단돼 DSM-5에서는 사라지게 됩니다.


아형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세부 진단 기준에서의 변화가 눈에 띕니다. 그 중 제가 오늘 얘기하고 싶은 부분은 조현병의 음상증상 중 하나인 정서적 둔마(affective flattening)가 DSM-5로 넘어오면서 감정 표현의 감소(diminished emotional expression)로 바뀌게 된 것과 관련 있습니다.




둔마라는 표현이 잘 와닿지가 않으시죠?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던 중 이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나, 그 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이나 이 표현이 별로 와닿지가 않습니다. 둔마라는 표현을 이해해 보고자 여러 문헌을 찾아보고 나름의 이미지를 그려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이 잔잔하게, 때로는 격하게 물결치는 감정을 경험한다면 조현병을 지닌 사람의 감정 경험은 평평한 유리 표면처럼 감정의 높낮이가 없는 그런 상태일까? 높낮이가 없다는 것은 감정을 경험하지 못 한다는 말의 다름이 아니지 않을까? 아니면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에 비해 감정을 약하게 경험한다는 것인가? 그게 둔마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는 것이죠.


누차 강조하지만 조현병을 지닌 사람의 감정 경험은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의 감정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조현병을 지닌 사람 역시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삶의 희노애락을 경험합니다. 아주 당연해 보이는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정신장애, 특히 조현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간과되기 쉬운 사실이기도 하죠. ‘정서적 둔마’라는 명료하지 못 한 표현이 이러한 편견에 일조하는 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삶의 희노애락을 경험하지만, 스스로가 경험한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에서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과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제가 이런 결론을 내리기까지 봤던 몇 편의 연구가 있는데 그 중 한 편을 오늘 소개하고자 합니다.




정서가 둔마되었다고 하는데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정말 매우 약화된 형태로 감정을 경험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과 비슷한 수준으로 감정을 느끼되 자신이 경험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일까? 저와 같은 의문을 품었던 임상가들이 과학적으로 이 문제를 검증하고자 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주관적 정서 경험과 실제 객관적으로 관찰된 정서 표현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Aghevli이라는 성을 지닌 미국 임상심리학 박사가 동료들과 함께 2003년에 퍼블리쉬한 재미있는 연구를 한 편 소개해 봅니다.(참조 2) DSM-IV 기준으로 조현병 진단이 내려진 33명의 외래 환자와 15명의 일반인을 비교한 연구입니다.


조현병 집단과 일반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각기 사회적 역할 연기(The role play test)라는 특정 과제를 수행하게 됩니다. 이 과제는 절차라든지 세부 수행 과정 등이 매우 구체화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연구자가 수행하더라도 동일한 절차를 따르게 돼 있는 그런 과제입니다. 실제 사회적 상황에서의 관찰 결과를 활용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실제 상황은 연구자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이 많고 이는 도출된 결과의 해석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행 연구들에서 지속적으로 검증된 이런 구조화된(structured) 과제를 사용하게 됩니다.


아무튼 이 과제가 가상의 상황이긴 하지만 실제 사회적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측함에 있어 신뢰할 만하다고 반복적으로 입증돼 왔기 때문에 이 연구에서도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사회적 역할 연기 과제를 사용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사회적 상황에서 조현병 집단과 일반인 집단이 ‘주관적 정서 경험’의 차이를 보이는지, 그리고 외부 관찰자가 보기에 두 집단이 ‘표현된 정서’에서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조현병 집단에서 주관적 정서 경험과 표현된 정서 사이의 차이가 있는지 여부를 가시화할 수 있습니다.




Adapted from Aghevli et al. Psychiatry Res 2003;119(3):261-70.


결과를 살펴보면, Fig 1은 주관적 정서 경험과 관련됩니다. 위쪽 그래프는 긍정적 정서 경험과 관련되고 아래쪽 그래프는 부정적 정서 경험과 관련됩니다. 두 그래프 모두에서 빈 막대가 일반인 집단을 의미하고 검은 막대가 조현병 집단을 의미합니다. Baseline은 우리가 기저선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평소 상태를 의미하고, Affiliation과 Assertion은 비교적 상반되는 두 사회적 상황을 의미합니다. 즉 전자는 일상적인 대화를 시작하는 상황과 관련되고 후자는 협상이나 타협과 관련되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결과를 보면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정서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든 간에 두 집단이 별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역할 과제를 수행하는 조현병 집단과 일반인 집단의 참가자들을 관찰한 외부 관찰자가 ‘표현된 정서’를 평가한 부분을 살펴볼까요?


표현되는 정서는 참가자들의 수행을 비디오로 녹화한 자료를 보며 FACES라는 평가 체계를 이용해 외부 관찰자가 평가했습니다.


역할 연기 이전에 증상과 관련한 인터뷰가 조현병 집단의 각각의 구성원에게 실시되는데, 이 실시 장면도 비디오에 담기게 됩니다. 이 인터뷰 장면은 SANS라는 평가 도구를 통해 외부 관찰자에 의해 평가됩니다. SANS 문항 중 정서적 둔마와 관련되는 다섯 문항을 사용했고 이를 통해 임상적 평가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다섯 문항의 내용을 살펴보면, 변하지 않는 얼굴 표정, 상대방의 눈을 잘 맞추지 못 하는 것, 억양이 부족한 것 등입니다. 각각의 문항에 대해 0점에서부터(not present; normal) 5점(severe) 사이에서 평가하게 되고요.


FACES와 SANS 모두 평가에 있어 외부 관찰자의 주관이 섞일 수밖에 없는바, 같은 자료를 또 다른 외부 관찰자가 평가하게 하여 두 관찰자 간의 일치도가 얼마나 높은지 보게 됩니다. 평가자 간 일치도를 본다고 하는데요. 본 연구에서 평가자 간 일치도가 매우 높은 수준으로 나왔습니다. 즉 표현되는 정서를 평가함에 있어 객관성을 확보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저널에 실릴 수 있었을 것이고요.




Adapted from Aghevli et al. Psychiatry Res 2003;119(3):261-70.


FACES 평가 체계는 저도 처음 보는 것이라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 합니다. 다만 위에 제시한 Fig. 2를 보시면 표현되는 정서에서 집단 간의 차이가 유의미했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Affiliative 상황에서 조현병 집단은 일반인 집단에 비해 유의미하게 낮은 수준의 긍정적 정서 표현이 나타났습니다. Assertive 상황에서도 조현병 집단은 일반인 집단에 비해 유의미하게 낮은 수준의 부정적 정서 표현이 나타났습니다. 긍정적 정서든 부정적 정서든 조현병 집단은 일반인 집단에 비해 유의미하게 표현을 덜 하는 것으로 나타났네요.


그럼 SANS로 측정한 정서적 둔마와 FACES 간의 상관이 있을까요? 즉 임상적 평가와 실제 행동 간의 상관이 있었을까요? 네 상관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정서적 둔마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수록 Affiliative 상황에서 긍정적 정서가 덜 나타났습니다. Assertive 상황에서도 유의미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연구자들은 SANS로 평가한 정서 둔마의 정도와 가상의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나타나는 정서 표현(FACES로 평가) 사이에 연관이 있어 보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현병을 지닌 사람이 역할 연기 과제에서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과 비슷한 수준의 주관적 정서 경험을 하지만 표현되는 정서에서 이처럼 집단 간 차이가 두드러지는 점은, 조현병을 지닌 사람이 약화된 형태로 정서를 경험한다는 생각의 타당성이 적음을 의미합니다.


정서가 둔마되었다는 표현이 약화된 형태의 정서 경험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이 연구뿐만 아니라 이 연구와 비슷한 결과를 도출한 다른 연구 성과들에 비추어 DSM-5에서 ‘정서적 둔마’가 아닌 ‘감정 표현의 감소’로 진단 기준을 바꾼 것 같습니다.


비슷한 말일 뿐이고 이러한 변화가 임상적으로 큰 영향이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임상가도 있는 것 같습니다.(참조 3) 하지만 제가 볼 때 정서적 둔마가 약화된 형태의 주관적 정서 경험을 포괄하는 뉘앙스를 조금이라도 갖고 있다면, 혹은 애초에 이 용어를 사용했던 저자의 의도와 달리 오해석의 여지가 있다면 감정 표현에서의 감소라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게 진단이나 치료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약화된 형태의 주관적 정서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임상가와 감정 표현에서의 감소라고 생각하는 임상가는 서로 다른 방식의 치료적 접근을 할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결과가 임상적으로 중요한 함의가 있다고 봅니다.




다음 글에서도 조현병을 지닌 사람의 정서에 초점을 두겠습니다. 저는 조현병을 지닌 사람의 정서 경험에 관심이 많습니다. 임상심리전문가가 되기 위해 수련생으로 일할 때 조현병을 지닌 환자분을 많이 평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생겼고, 공부를 틈틈이 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런 쪽으로 얘기를 많이 하게 되네요.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즐거움을 어떻게 경험하는 것일까요? 조현병을 지닌 분을 심리평가할 때, 살아오며 즐거웠거나 행복했던 때가 언제인지 떠올려 보라고 하면 대답을 잘 못 하는 분이 많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즐거운 사건에 대한 기대도 적어 보이고요. 전반적으로 조현병을 지닌 사람은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보다 즐거운 일에 대한 기억이나 기대가 적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현병을 지닌 사람이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 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다음 글에서 자세히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참조)  

1. McKenna, P. J., & Oh, T. M. (2005). Schizophrenic Speech: Making Sense of Bathroots and Ponds that Fall in Doorways. UK: University Press, Cambridge.

2. Minu A. Aghevli., Jack J. Blanchard., and William P. Horan. (2003). The expression and experience of emotion in schizophrenia: a study of social interactions. Psychiatry Research 119, (3), 261-270.

3. 조철현, 이헌정 (2014). DSM-5의 조현병 스펙트럼 장애 : 새로운 변화인가?. 대한조현병학회지, 17,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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