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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송인 Oct 05. 2019

조현병: 망상과 내외적 소외에 관하여

앞서의 글에서 언급하였듯이 조현병은 이질적인 증상의 집합체 혹은 증후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현병의 증상에는 망상, 환각, 와해된 행동, 와해된 언어, 음성 증상이 있습니다. 오늘은 망상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고 유지되는지 사회적 소외와 관련하여 설명해 보겠습니다. 또한 망상과 사회적 소외가 깊어진 결과, 자기 생각이나 감정에 대해서도 확신하기가 어려운 내적 소외가 심화될 수 있음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가 노벨상 수장자 존 내쉬의 피해망상에 관해 매우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고, 이에 조현병을 언급하는 많은 글에서 이 영화를 언급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망상은 이렇게 드라마틱하고 체계적인 내용에서부터 ‘배우자가 바람을 피고 있다’처럼 어느 정도 현실적이고 심지어 환자 얘기만 들으면 개연성이 있다고 여겨지기도 하는 내용까지 그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망상으로 우리가 정의 내리기 위해서는 어떤 생각이 실제 사실과 현저하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그 생각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상황이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임상가는 환자의 보고에 불합리한 측면이나 오류가 없는지 가족이나 제 삼자의 말을 들어보며 사실 관계를 따져 보게 됩니다. 가족이나 제 삼자의 보고 역시 주관성이 개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걸러 들어야 할 필요는 있으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검토하고 환자가 보이는 다른 증상들을 통합적으로 고려하다 보면 환자의 보고 내용이 망상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일은 생각처럼 그렇게 까다롭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망상의 보편적인 주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교과서적으로는 피해망상, 질투망상, 색정망상, 종교망상, 과대망상 등이 있습니다. 내용은 다르지만 망상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인 중 제가 이전 글에서 조현병 환자의 보편적 경험으로 언급했던 소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소외가 어떻게 망상과 관련된다는 거지?'라고 의아해 할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소외에는 내적 소외와 사회적 소외가 있는데 우선 사회적 소외에 대해서 다루겠습니다. 사회적 소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빈도가 낮아지거나(극단적으로는 관계가 전혀 없다거나) 관계 깊이가 얕아질 때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회적 소외는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인 외로움을 불러일으키죠. 외로움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수반하는 사회적 소외가 망상이라고 하는 특정 증상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 잘 이해가 되지 않거나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주제의 망상이든 간에 망상은 처음부터 망상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피해망상은 아주 자연스러운 의심에서부터 시작하여 간헐적인 피해의식을 거쳐 반복적인 피해사고의 경험으로 이어지고, 이후 체계적인 망상, 즉 그릇된 사실에 대한 확고한 신념 체계로 굳어지게 됩니다. 정신장애를 지닌 환자가 나타내는 어떤 증상이 있다고 할 때, 이 증상이 정신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에게서도 발견되는 특정 기능의 극단적 표현인 것인지, 아니면 증상과 기능이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것인지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마는, 저는 거의 모든 정신병리가 인간의 보편적 기능의 어느 극단에서 발생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망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심에서 망상으로 발전하기까지의 연속선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의심에서 망상으로 발전하기까지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증상의 악화에서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발생합니다. 의심의 수준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그 의심을 불식시킬 만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매우 쉽습니다. 더욱이 의심의 수준에서는 증상으로 인한 일상생활의 기능 저하가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심각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가 유지되기 마련이며, 이는 의심을 불식시킬 만한 증거를 제시하는 사람이나 기회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의심에서 피해의식으로 피해의식에서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춘 피해사고로, 피해사고에서 망상으로 변화되면서 환자분이 지닌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이 갈수록 어렵게 됩니다. 더욱이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발생할 가능성도 낮아지게 됩니다. 증상이 현저해질수록 사회적 관계를 비롯한 일상생활 기능에서 눈에 띄는 저하가 발생하고, 이는 사회적 소외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의심에서 망상으로 발전할수록 생각을 수정하기가 어려워지는데, 이 과정에서 사회적 소외가 비례하여 심해질 가능성이 높고 이에 생각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드니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한 번 망상으로 굳어지면 망상으로 인해 일상생활이 심각하게 저해됨에도 불구하고 치료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처럼 사회적 소외, 즉 사회로부터의 소외는 망상의 형성 및 강화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실제로 조현병 진단을 받고 정신과에 외래로 내원하거나 입원해 계신 분들을 면담해 보면 친구가 한 명도 없는 경우가 한 명이라도 있는 경우보다 더 많습니다. 다른 가족 구성원과도 단절돼 있는 경우가 많죠. 조현병 증상으로 인해 직업 기능에서도 문제가 발생하는 일이 많고, 결과적으로 하루에 말 한마디라도 건낼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 자기에 대한 감각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톰 행크스가 주연했던 캐스트 어웨이라는 영화에 보면 무인도에 불시착해 말 건낼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주인공이 배구공에 사람 얼굴을 그려놓고 윌슨이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리고 정말 친구처럼 대하죠. 윌슨이 없었다면 톰 행크스는 자기에 대한 통합된 감각을 잃어버리고 결과적으로 온전한 의식상태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사회적 소외가 망상이 형성되고 강화되는 데 영향을 미치면, 강화된 망상으로 인해 사회적 소외가 다시 심해지는 악순환이 발생합니다. 이 과정에서 조현병을 지닌 환자분들이 경험하는 내적 소외도 심해집니다. 우리는 사회 안에 어떤 식으로든 심리적 닻을 내려 자기감을 유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망상과 사회적 소외는 이 닻을 거두어 올리며, ‘나’라고 하는 배를 망망대해로 흘려보내 결국 사라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자기에 대한 통합된 감각을 상실해 가는 것입니다.


망상이라는 견고한 신념 체계가 형성되기까지 사회적 소외뿐만 아니라 다른 강화 요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환자분이 지녔던 피해의식이 자기 결점을 방어하게 하여 인사고과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승진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죠. 피해망상을 가지고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고립돼 있는 사람은 자기를 해하려고 쫓아오는 누군가를 통해 사회적 고립을 면할 수 있습니다. 앞서 배구공 윌슨처럼 내게 피해를 주려고 쫓아오는 그 사람이 내가 닻을 내릴 수 있는 사회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현실이 아닌 것에 토대를 둔 자기감은 허공 위에 쌓은 탑이라 무너지기 쉽습니다. 망상을 통해 그나마 자기에 대한 통합된 감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망상이 지속될수록 자기감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지게 돼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에 대한 확신조차도 가질 수 없게 되는 내적 소외가 깊어지면 압도적인 혼란감에 빠진 채 자살을 시도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를 떠올려 보면, 조현병에 대한 현대적 개념을 백 년 전쯤 최초로 제시했던 Kraepelin이 오늘날의 조현병을 가리켜 치료가 불가능한 조발성 치매(dementia praecox)라고 일컬었던 것이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크레펠린이 dementia라는 단어를 요즘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외로 한다면요.) 그는 조현병을 지닌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제반 기능상의 저하 양상이 치매 환자들이 경험하는 것과 같은 혼란감과 일상에 만연한 불쾌한 기분, 전반적인 정신의 쇠약 등과 닮아 있다고 느꼈을 수 있겠습니다. 아울러 1900년대 초반에 조현병을 개념 정의하는 데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정신과 의사인 Bleuler가 조현병의 핵심 요소 네 가지 중 autism을 언급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채 공상 세계에 몰두하는 조현병 환자들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autism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 같다는 점에서요.




망상과 사회적 소외가 상호작용하여 내적 소외와 혼란감을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조현병을 지닌 환자의 이런 주관적 경험을 일반인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임상가도 마찬가지죠. 그 누가 진정으로 이들의 경험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현병을 지녔으나 현저한 증상은 현재 나타나지 않는 환자분조차 극도의 소외와 절망을 경험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며 조현병을 지닌 사람의 내적 경험을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오늘의 글 주제와 관련이 깊은 영상을 링크합니다. 13분짜리 애니메이션인데, 제가 말로 설명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여러분에게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아 첨부해요. 조현병 환자가 경험하는 심리적 고통을 공감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https://youtu.be/riyvtZ3Wsw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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