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트라우마와 몸]이라는 책 6장에 나오는 행위 체계와 행위 경향이라는 개념을 살펴보려 합니다.
행위체계라는 건 돌봄, 놀이, 애착, 생존(섭식, 수면, 섹스) 등에 연관된 일련의 행동 패턴입니다. 행위 체계에는 위계가 있는데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며 상황에 따라 상위에서 작동하는 체계가 달라집니다. 행위 경향은 제가 이해하기로 특정 상황에서 어떤 체계가 주로 상위에 위치하느냐의 문제 같습니다. 예를 들어, 안정적인 상황에서는 놀이 체계가 상위에 위치하는 경향을 보일 테고,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생존이 상위에 위치하는 경향을 보일 것입니다.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은 상황에 따른 행위 경향의 가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늘 생존이 최상위에 위치하다 보니 놀이나 애착이 어렵게 됩니다. 따라서 트라우마와 몸의 저자가 개발한 감각운동 심리치료의 목표는 행위 경향에 유연성을 불어넣는 것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늘 생존지향적으로 반응하는 몸의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이러한 과정은 비단 트라우마 치료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심리치료의 목표 역시 자기와의 관계, 그리고 타인과의 내적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자기 및 타인과의 내적 관계를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해리 스택 설리반의 정신치료 기술] 2장은 이 알아차림에 관한 내용입니다. 정신분석의 치료 목표는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입니다. 설리반 또한 내담자의 자각밖에 있는 그 자신의 인간관계 패턴을 자각하는 것을 치료 전개의 초석으로 삼습니다. 정신분석이 실체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어려운 성격의 삼원구조에 관해 이야기한 데 반해 설리반은 관찰가능하고 검증가능한 내담자의 구체적 대인관계 양상 및 내담자-치료자 관계 패턴에 초점 맞춘다는 점에서 로저스가 지향했던 바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 양상은 내적작동모델의 영향을 받습니다. 훗날 존 볼비가 Kenneth Craik과 Jean Piaget의 영향을 받아 내적작동모델(internal working model)로 개념화한 내용은 쉽게 말해 과거에 형성된 다른 사람에 대한 기대가 현재 다른 사람과 맺는 실제 관계 양상과 상호작용하며 한 사람의 고유한 대인관계 청사진을 형성(shape)한다는 것입니다. 이 청사진은 앞서 말했던 행위 경향을 안내하는 지도 같은 것입니다. 학대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다른 사람은 위험하다는 청사진을 가지고 사회적 상황 자체를 회피하거나 더 큰 해를 피하기 위한 전략으로 무조건적인 순응을 보이는 행위 경향을 성격적인 방어로 공고화할 수 있겠죠.
상담에 오는 내담자는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과 비슷하게 행위 경향의 유연성이 부족하고, 그 근본적인 이유는 내적작동모델의 가변성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우리 뇌가 가소성을 지니듯이 내적작동모델 또한 상황의 영향을 받아 계속 변화됩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들로 인해 내적작동모델의 경직성을 띠게 되면 그 사람의 대인관계가 적응적일 가능성 또한 낮아지겠죠. 예를 들어 배우자에게는 여성성을 살려 다정하게, 상사와의 관계에서는 남성성을 살려 목적및 성취 지향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적응적일 테니까요.
대인관계 양상에 관한 내담자와의 협력적 탐색과 '합의적 확인'을 거친 사례개념화(case formulation)를 통해, 설리반은 내담자가 스스로의 인간관계에 대한 통찰을 발전시키고 이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여 향후 인간관계에서 보다 유연한 관계 맺음을 가능케 하는 변화를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사례개념화한 내용은 내적작동모델이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의 다름이 아니며, 내담자가 자기 및 타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지각하고 있으며 실제로 어떤 행위 경향을 보이고 있는지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알아차리지 못 하는 것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상담에서는 자기 및 타인에 대해 내담자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또한 설리반이 말했듯이 실제 행위 경향이 어떤지를 알아차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설리반은 내담자의 인간관계 양상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 매우 구체적이고 협력적으로 내담자와 탐색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 때 치료자의 알아차림이 내담자의 언어적/비언어적 표현 중 주의의 초점을 맞춰야 할 내용과 그렇지 못 한 내용을 구분하는 것을 가능케 합니다. 주요한 세부사항으로 주의를 돌림으로써 "현재의 감정적 어려움을 과거의 인간관계 트라우마로 연결시키는 초기 단계"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이후 과거에 애착 대상과의 관계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그것이 현재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되풀이되는지 알아차리는 가운데, 상황에 무관하게 경직된 방식으로 적용되는 내적작동모델과 실제 행위 모두를 변화시키고자 내담자와 치료자가 함께 노력하게 됩니다.
"치료자의 과제는 환자의 삶에서 다양한 종류의 인간 관계적 위협과 의미를 환자와 함께 탐색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자주 그의 어린 시절이나 초기 청소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간관계의 유형의 기원이 필요하고, 공식을 통해 추적합니다. 현재의 괴로움은 그 원천과 역사라는 면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부분은 정신분석이나 존 볼비의 애착이론과도 통하는 지점인 것 같습니다.
몇십 년에 걸쳐 형성된 내적작동모델과 행위 경향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지난한 치료적 작업이지만, 내담자와 치료자 사이에 맺어진 정서적 유대와 신뢰를 통해 단기간에 변화를 향한 일보를 내딛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