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김밥 놀이를 했던 기억 때문일까.
어릴 적 이불에 몸을 돌돌 말아 김밥 놀이를 했던 기억 탓일까. 나는 지금도 김밥에서 까르륵 하는 웃음소리가 나는 듯 하다.
김밥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소풍이라는 단어를 떼어 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다. 깨소금이 솔솔 뿌려진 김밥이 담긴 도시락은 어린 나에게 참기름 냄새가 솔솔 나는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가게에서 한 줄에 천원 정도에 간편하게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손이 많이 가는 김밥을 새벽부터 말고 또 말았던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도시락은 소풍날 나의 옆구리에 늘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 김밥이라는 것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한 끼의 간편한 식사로 꽤 괜찮은 음식이라는 것, 소풍과 어울리는 설렘이 담겨 있는 음식이라는 것, 그리고 햄이나 맛살 등의 색소가 첨가된 재료 탓에 몸에는 그리 좋지 않은 음식이라는 것. 물론 어린 날 나의 김밥에는 혹시나 소풍날 비가 오지나 않을까 걱정하던 먹구름 같은 마음이 지난 후 햇볕을 머금은 파란 하늘의 구름을 맛보는 듯한 설렘이 늘 존재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나이가 들고 나서 김밥에 대한 좋지 않은 진실(영양학적으로 좋지 않다든가 하는)을 알게 되었을 때, 그저 그것이 김밥에 대한 모함 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아무튼, 이 김밥이라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음식임에 틀림이 없다. 어디에서 어떤 기준으로 모였는지 모를 재료들이 한데 모여 꽤 그럴싸한 맛을 만들어 낸다.
이제 막 밥솥에서 태어난 하얀 쌀알이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바람을 쐬고 있다. 후-후-
조금 차가워진 뽀얀 몸에 미끈한 참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솔솔 쳐주면, 이제 더 이상 어리고 뭣 모르는 그냥 밥이 아니다. 한결 성숙해진 밥알을 김에 고르게 펴 발라준다. 첫 만남에 찰싹 붙어 조금 어색한 기운을 풍기는 그들 뒤로 접시에 가득 모인 재료들끼리 수다가 한바탕 벌어진다.
맛살은 유연하고 탱글탱글한 몸을 베베 꼬며 빨간 립스틱을 자꾸만 덧바르고 있다. 아마도 저 멀리 대서양이 고향이었던 '캔'이라는 참치에게 잘보이기 위해서인 듯 하다. 푸른 바다에서의 이런 저런 허풍이 섞인 그의 무용담에 맛살은 그 유연한 몸을 연신 끄덕이느라 정신이 없다. 그 옆에는 노란 단무지가 그 단단한 몸을 자꾸만 곧게 펴면서 노오란 계란 옆에서 으스 대고 있다. 모름지기 음식이란 노랗고 단단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단무지에게 계란은 그저 운동 부족의 누렁이일 뿐이다. 그 옆에는 새초롬한 시금치가 방금 셋팅된 파마가 풀어지기라도 할까봐 쌜쭉하게 뻗어 있다. 자신이 원래는 소였다는 둥 사실은 돼지였다는 둥 닭일 수도 있다는 둥, 우쭐대며 떠들어대는 햄이 행여나 자기 머리를 치지나 않을까 걱정되는 시금치였다. 등에 뭐 저렇게 칼자국이 많은지, 방금 하고 온 파마가 저 손에 걸리기라도 하면 단번에 엉망이 되어 버릴 터였다.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인사하고 자기 소개를 하느라고 꽤나 왁자지껄한 느낌이다.
이제 슬슬 노란 단무지를 집어 밥 위에 놓는다. 단단하고 곧은 체격 탓에 자꾸만 발이 김 밖으로 튀어 나간다. 나머지를 하나씩 밥 위로 정중하게 모시는데 여기 저기서 난리들이 난다. 시금치는 자기 머리가 결국 햄에 눌렸다며 짜증 섞인 비명을 지르고, 유연한 맛살이 살짝 휘면서 계란의 옆구리를 건드리는 바람에 간지러움 많은 계란이 병아리처럼 짹짹 울어 댄다.
따끈한 밥알이 그들을 포근히 감싸안으며 이불 처럼 도르륵 말린다. 그렇게 그들은 투덜투덜대면서도 김밥이라는 이름의 가족이 된다.
나는 여전히 김밥을 말 때면, 여기 저기서 모인 재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까르륵하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마치 어린 아이가 김밥 놀이를 하는 듯한 그 해맑은 모습에, 나는 어린 시절 소풍 날 보았던 푸르른 하늘 속 솜사탕 같은 구름을 떠올린다. 그리고 입안 가득 김밥의 고소한 참기름 향이 퍼지면, 어머니의 도시락 하나만으로 든든했던 순수한 그 시절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