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리뷰
주재원으로 파견된 남편 때문에 잠시 대만에 머문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어렸고 중국어는 시원치 않은 터라 갖은 고생을 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세상사 모든 것이 그렇듯 시간을 거슬러 가져온 기억들은 모두 그리운 것으로 남는다. 낯선 이국에서의 고군분투했던 어려움은 까마득한 시간 저편에 묻히고 지금 돌이켜 보면 대만에서의 생활들도 아련한 그림움으로만 남아 있다. 그 시절을 떠올릴 때면 언제나 제일 앞장서서 달려오는 몇몇 풍경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말할 수 없는 비밀'이란 영화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다. 워낙 영화의 장면들이 예쁘기도 했지만, 갓 배운 중국어 실력으로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집중해 본 탓인지 씬 하나하나가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영화를 보고 반해버려 달려갔던 담수(단쉐이)는 석양이 아름다운 대만의 명소다. 곳곳에 노을이 아름답게 드리워지던 산책로에서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자전거를 빌려 한참을 달렸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사실 자전거 타기에 그리 호락호락한 장소는 아니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그 길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이 영화에서 만큼 그렇게 낭만적이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잠시나마 영화 속 샹륜(주걸륜 역)과 샤오위(계륜미 역)가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타국의 삶을 동경했었던 나였기에 처음엔 고민도 하지 않고 따라나선 이국 생활이었지만 낯선 환경과 풍토에서의 육아와 일상은 나를 외롭게 만들었다. 그렇게 점점 외로움에 지쳐가다 향수병에까지 걸렸던 나를 일으켜 세울 뭔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일종의 낭만 같은 설렘 말이다. 그래서 더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에 취했었나 보다. 그렇게 나는 이국적인 장소에서 본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랑 영화에 홀려서 촬영 장소를 직접 답습하는 호사를 맘껏 누렸다.
아버지 때문에 예술 고등학교로 전학을 온 상륜은 우연히 들은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오래된 허름한 음악실로 들어서게 된다. 그곳에서 샤오위라는 어딘가 신비로운 소녀를 만나고, 샹륜은 방금 연주한 곡의 제목을 묻지만 샤오위는 비밀(secret)이라고만 말한다. 예쁘지만 요즘 소녀 같지 않은 독특한 분위기를 지닌 샤오위에게 상륜은 첫눈에 반한다. 샤오위 역시 피아노를 찰 지는 상륜에게 끌리게 되고 그렇게 낡은 음악실에서의 둘의 특별한 만남은 계속된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은 특별한 사랑 이야기다.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면서 진행되는 판타지 러브 스토리니 말이다. 지금이야 흔하디 흔한 타입 슬립 러브 스토리지만 그 당시만 해도 새로운 장르였다. 그래서 뻔한 첫사랑 이야기에 식상했던 관객들에게 신선함을 던져주었고, 그 시절 대만의 타이베이 거리는 온통 이 영화 포스터로 도배됐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꽤나 회자되었다는... 영화 자체도 인기가 있었지만 워낙 유명한 영화 속 피아노 배틀 씬은 내가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여기저기서 오랫동안 패러디되었다.
영화가 관객을 사로잡는 가장 큰 매력을 뽑으라면 주저 없이 <종합 예술>이란 점을 들고 싶다. 그런 특성이 가장 잘 살아난 영화 중 하나가 바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이다. 멋진 음악, 아름다운 장면들 그리고 절절한 러브 스토리까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다. 영화 관람 하나로 쇼팽에서부터 주걸륜 노래까지 들을 수 있었고, 배경처럼 나오는 석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내었다. 십 대의 사랑 이야기인 만큼 오글거리는 장면들도 간간히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장면들마저도 풋풋한 십 대 시절에 어울려서 좋았다.
샤오위에겐 진짜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었고 그걸 누군가에게 말한 탓에 비극을 맞게 된다. 하지만 뒤늦게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상륜이 샤오위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 '비밀스러운 곡'을 피아노로 연주한다. 낡은 음악실이 있는 건물을 철거하는 날 마지막 땀방울을 떨어트리며 상륜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로 꼽힌다.
슬픈 사랑이야기를 시간 여행이란 판타지 장르를 택해 해피앤딩으로 마무리 한 감독 겸 극본가 겸, 가수 겸, 배우인 주걸륜의 재능도 놀랍다. 우리나라에선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주걸륜은 그때 당시 대만 최고의 스타였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그가 그토록 사랑받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작은 오해로 비롯되어 샤오위와 더 이상 못 만나는 상륜이 샤오위의 집에 찾아갔을 때의 장면이다. 이십 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어 창문 뒤에서 상륜을 바라보는 샤오위의 시점 쇼트가 나는 이상하게도 제일 가슴 아픈 장면이었다.
첫사랑은 처음이라 서툴러서 많이들 안 이루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도 거슬로 올라갈 수 있는 절절한 사랑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워스 샤오 위(나는 샤오위 야)
워 아이 니(나는 너를 사랑해)
니 아이 워 마?(너도 나를 사랑하니?)
책상에 화이트로 써 내려가던 샤오위의 간절함, 그 간절함이 이십 년을 뛰어넘어 샹륜에게 전달되고 결국 그를 다시 자신에게 불러올 수 있었다. 그런 간절한 마음은 그 나이에서만 나 올 수 있는 게 아닐까. 아직은 순수해서 계산 같은 건 1도 없는 십 대의 시절에서만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특별히 더 반짝반짝 빛나는 거 같다. 인생의 최고로 반짝이던 시절들을 담은 영화라서.
지금도 눈을 감으면 떠오른다. 석양이 눈이 시리도록 파고들던 딴쉐이의 그 거리와, 그곳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샹륜과 샤오위의 설렘 가득한 모습이. 그 장면들은 이상하리 만큼 시간을 거슬러 생생하게 나에게 밀려온다. 그래서 풍파가가 많았던 나의 대만의 체류기는 내 기억을 왜곡하여 가장 반짝거렸던 순간으로 박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