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소설 - 침묵하는 조직 속에서 사라진 진실
강 선생은 은수의 조언대로 준영 어머니와 다시 상담했고, 결국 준영이 원래 예민하고 욱하는 성향이 있다는 말을 전하게 되었다. 이 말에 준영 어머니는 격분했다. 자신이 작년에 임시 담임에게 들었던 것과 똑같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준영의 어머니가 알지 못하는 게 하나 있었다. 작년 임시 담임이 그렇게 말했던 건, 휴직한 은수가 그렇게 전해줬기 때문이었다.
길길이 날뛰는 준영 모의 감정을 자제시키기 위해서 강 교사는 준영을 불러 함께 그날의 진상을 다시 맞춰 보았다. 준영은 담담하게 사실 그대로를 전했고, 준영의 태도를 살피며 집중해서 듣던 강 선생은 준영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민호가 준영의 바지를 벗기려 한 행동은 아무리 아이들이라지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짓이었다. 아니 성추행에 가까운 끔찍한 짓이었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던 강 선생은 문득 자신이 은수의 치밀한 모략에 이용당했음을 깨달았다. 교묘하게 책임 전가하려는 덫에 걸려든 거란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 그녀는 교장실로 향했다. 하지만 학교는 만사에 있어 조용함을 추구하는 집단이었다.
"강민지 선생,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학교가 시끄러워지면 모두에게 피해가 와. 이 선생이 아팠던 몸을 이기고 복직했는데, 그쪽에 책임을 몰아 지우게 할 수도 없잖아. 나도 지금 아주 곤란한 상황이야. 젊은 교사가 조금 양보한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서로의 잘못이라며 넘어가요."
자신의 평판과 학교의 안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교장은 강 선생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학년 주임인 박 교사와 최 교사를 비롯한 동료 교사들 역시 괜히 나섰다가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무서워 침묵을 택했다. 이런 식이면 비겁한 침묵 속에서, 은수의 계략 대로 쌍방 과실이란 결과를 내며 학교폭력 위원회는 조용히 막을 내릴 것이다. 평생 부모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은수는 자신을 향한 동료들의 암묵적인 지지를 보면서 오랜만에 충만한 만족감을 느꼈다.
마침내 학폭위원회가 열렸다. 강 선생을 지지할 사람을 없었지만 용기를 내어 피해 학생 준영의 입장을 피력했다. 그리고 가해 학생 민호에 대한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민호의 부모 측은 은수의 각본대로 '신입 교사의 미숙한 대처'와 '피해 학생의 예민함'을 강조했다. 교장을 비롯한 위원들은 논의 끝에 민호가 잘못했지만 실수든 뭐든 먼저 얼굴을 발로 찬 건 준영이었기에 쌍방 과실로 결론지었다. 결국 가해 학생에게 어떠한 실질적인 처벌도 내리지 않고 가벼운 '주의 조치' 수준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처벌도 없는 학교에 아이를 어떻게 보냅니까! 준영이가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하다는 걸 어린 나이에 벌써 알게 되다니...... 흑흑"
준영 어머니는 뒤늦게 용기를 낸 여학생의 증언을 얻었지만, 이미 내려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학교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은 준영이 부모는 결국 아이를 전학시켰다. 그렇게 그 사건은 피해자가 억울하게 학교를 떠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강 선생은 학폭위 결과를 보고 절망했다. 자신이 믿고 존경했던 선배 교사가 얼마나 간사한 사람인지도 깨달았다. 게다가 학교라는 조직은 또 얼마나 속물적이고 비겁한 집단인가? 그녀는 교사들의 가식과 비열함에 염증을 느껴 사직서를 제출하고 학교를 떠났다. 결국 희생양은 은수의 모략과 조직의 침묵에 대항했던 강민지 교사 하나였다.
강교사가 짐을 챙겨 떠나던 날, 은수는 선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배웅해 줬다.
“그래, 몸에 안 맞는 일은 그만두고 이참에 새 출발 해. 강 선생은 나이도 어리고 재능도 많아서 곧 좋은 직장을 찾을 거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작별 인사를 하는 은수를 보면서 강교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수의 얼굴엔 비열한 웃음이 가득 피어났다.
'그러게 누가 처녀 아니라고 가냘픈 허리를 자랑하는 옷만 입고 잘난 척 하래? 아니 누가 어리다고 팽팽한 피부 빳빳하게 들고 다니래?’
은수는 암투병 시절의 고통과 어린 시절의 부모에 받던 차별이 한순간에 날아간 기분이 들었다. 왠지 몸도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누군가를 밟아 버렸다는 성취감에 취해 은수는 반쯤 남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향긋하게 퍼지는 헤이즐럿 향을 맡으면서 은수는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새로 복직했던 한 해가 조용히 저물어 갔다. 내년도 학급 명단을 들여다보던 은수의 눈빛은 의욕으로 번들거렸다. 명단 속 새로운 학생들, 그리고 새로운 동료 교사들. 초등학교란 특성상 내년에도 많은 사건들이 일어날 거다. 하지만 은수네 반은 여전히 조용할 거다. 아니 조용해야만 한다. 무슨 일이 생기든 자신의 책임을 전가할 새로운 햇병아리 교사들이 내년에도 새로 전임해 올 테니 걱정 없다. 은수가 살면서 느껴왔던 질투와 피해의식은 그 새로운 '먹잇감'들이 또 해소시켜 줄 거다. 그녀는 조용히 함정을 파 놓고 누군가가 걸려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은수는 만족스럽다는 듯 다시 한번 웃었다. 그 웃음은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암이 만들어낸, 지독하게 섬뜩한 승리의 미소였다.
그렇게 그녀는 점점 더 그늘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