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한 인내심
1년의 사이클이 돌아야 하나의 일에 대해 알 수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 일이 많고 언제 일이 적은 지, 여름에는 뭘 조심해야 하고 겨울에는 뭘 더 대비해야 하는지. 1년 동안 수리비가 대략 얼마가 나오는지 파악해서 다달이 수리비를 빼놓아야 하고 1년 동안 일이 가장 없을 때를 대비해서 생활비도 빼두어야 한다. 중고차를 산 우리는 새 차를 살 돈도 모아두어야 하는데 첫해는 그게 불가능하다. 초보자들은 어쩔 수 없이 정확하지 않은 상황 위에서 꾸역꾸역 일을 끌어가야 한다. 그래도 남편이 화물을 시작한 지 반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다.
처음에 우리가 화물 일을 시작한 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남편은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일을 도우며 자랐고 성인이 되어서는 일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부모님의 밑에서 쭉 자라왔다. 나는 남편이 대학생일 때 처음 만났는데 대학교 시험 기간이라 방해될까 봐 먼저 연락하지 않고 있었던 내가 무색하게 그는 부모님의 부름으로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대학교 학점이 취업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기에 나는 어이없어했지만 부모님의 우선순위는 확고했던 것 같다.
남편은 나와 결혼을 하고 작은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부모님은 남편에게 공장을 물려주겠다고 하셨고 공장에서 일을 배우길 바랐다. 그렇게 남편은 부모님의 밑에서 꼬박 17년을 일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공장을 물려주실 생각이 없으셨다.
결국 잦아지는 싸움을 피해 남편은 백기를 들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몸에 배일 때로 배여서 그 힘든 일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진다고 했던 남편이었는데 그동안 남편이 했던 일은 어떤 인정도 받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평생 하던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로 바꿀 때 그 두려움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남편은 상실감으로 감정의 공간이 텅 빌 대로 비어서 어떤 감정이든 채워 넣어야 했던 것 같다. 그게 희망이었으면 좋았겠지만 두려움과 불안함이 뒤섞인 감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고여있기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갇혀있기보다 벗어나길 바랐고 온전히 우리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삶을 원했다.
멀리서 보면 단순해 보이는 화물일도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알아야 할 것들이 늘어난다. 이직도 어렵고 일도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지만 우리가 이렇게 많은 일을 ‘공유’했던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서로를 받쳐주고 있는 기분이다.
‘공유’
어쩌다 ‘화물일’에서 튀어나온 저 단어는 우리의 결혼 생활에 ’ 아이‘ 다음으로 공유할 거리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애 시절에 ’ 사랑‘은 공유가 아닌 각자의 방법으로 서로를 사랑했을 테고 ‘아이’는 온전한 공유였다면 ‘화물일’은 초심자로서의 공유다. 이 또한 시간이 지나서 남편이 능숙한 화물 운전기사로 거듭난다면 내게 공유가 아닌 설명을 하려 들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잠깐의 ’ 공유‘가 기쁘다. 함께 고개를 갸웃거리고, 함께 방법을 모색해 본다.
여전히 주위에서는 걱정하는 이들도 많고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는 이들도 많다. 또 화물일을 하고 싶어 물어보는 이들도 있다.
어느 길이나 그렇겠지만 이 일이 평탄하지만은 않다. 그 큰 트럭을 몰려면 담대한 마음도 필요하고, 하루에 12시간을 운전하려면 튼튼한 허리와 엉덩이 살도 웬만큼 있어야 한다. 빠르게 밥을 먹는 스킬도 필요하고, 서로 졸음을 쫓아주며 길을 공유할 친구도, 차 상태를 물어볼 믿음직한 선배도 있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정말로 가장 중요한 건, 스스로 자신에게 ’차분한 인내심’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길이 막혀도, 길이 뚫려도 화물차는 안전하게 속도를 유지하며 달려야 한다. 차가 막혀 시간이 늦어도 조바심을 내지 않아야 하고, 당장 배가 고파도 몇 시간이고 참고 대기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필요한 건, ‘준비된 마음’인 것이다.
이직? 할 만하다.
미완성? 나쁘지 않다.
용기? 내볼 만하다.
-Picture by Yeshi kangrang i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