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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진 Jul 09. 2021

보통, 잘함, 매우 잘함.

나뉘는 것에 익숙해지다.



“운전에도 보통, 잘함, 매우 잘함이 있어? “


“응? “

설거지를 하다 뒤돌아보니

식탁 위에 제 운전 면허증을 들고 있는 아이가 보입니다. 비대면 계좌를 트려고 신분증 인식을 위해 올려놓았던걸 깜박하고 넣어두지 않았나 봅니다:


“보통, 매우 잘함 이런 게 있어? “

아이가 재차 묻자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응~ 있지.

엄마는 보통, 아빠는 잘함, 할아버지는 매우 잘함.”


면허증의 위쪽 귀퉁이에 쓰인 ‘1종 보통’ 글자.

아이는 자신의 세계에서 쓰이는 잣대로 어른들도 나뉘는 걸까 라고 생각했을까요?

아직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는 일입니다.



나누는 것.

평가.


아이들은 이미 익숙해져 가는 듯합니다.

‘나뉘는 것’에 대해 말입니다.

예체능을 제외하고 아이들이 제일 먼저 다니는 학원은 영어 학원입니다.

영어학원은 제가 보기에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나눕니다. 파닉스도 들어온 순서대로 반이 나뉘고 리딩도 책 순서대로 반이 나뉩니다.

주에 한번, 달에 한번 치는 시험으로 반이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합니다.


어른들은 레버를 쥐고 있습니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조절하는 것처럼 필요에 의한 레버가 아닙니다.

그저 흔들리며 요동치는 파도를 계속 생성해서 내보내기 위한 레버입니다. 비싼 돈으로 만드는 인공파도입니다.

아이들은 정신없는 파도 속에서도 1센티라도 더 떠오르기 위해 발을 구릅니다. 예전 파도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 떠오른다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재미있어하는 아이도 있을 테지만 그 수는 소수일 테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저, 이리저리 둥둥 떠다니기만 합니다.


‘페인트’라는 이희영 님의 책이 있습니다.

출판사 창비에서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책에서는 아이들이 부모가 될 사람의 면접을 보는 것을 ‘페인트’라고 부릅니다.


어른들은 평가를 받습니다.

아이들을 키우기에 좋은 부모인지 아닌지 센터의 까다로운 검증을 거친 후에야

아이를 직접 만나 볼 기회가 생깁니다.

아이는 자신에게 맞는 부모인지 아닌지를 살핍니다.


이런 반대의 입장이 되어도 저희 아이들은 부모로서 저를 다시 선택해줄까요?

제가 면접을 본다면 ‘매우 잘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요리는 보통 (더운 날에는 파업합니다.), 빨래는 노력 바람 (아이가 티셔츠 새로 샀냐고 가끔 묻습니다. 색상이 마법처럼 변합니다.), 보육은 잘함 (공감 토크가 가능합니다.),

교육은 노력 바람 (화를 냅니다. 화는 옆 아이에게 번집니다)을 받는다면,


저는 평균 ‘잘함’ 도 받기 어렵겠습니다.  




노력 바람, 보통, 잘함, 매우 잘함.

이 단계가 함축하고 있는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격려? 응원? 칭찬?


혹시 이런 말들의 포장은 아닐까요?

노력 바람 - 머리를 굴려 이 바보야.
보통 - 더 잘해볼 생각은 없고?
잘함 - 이 정도면 쓸만해.
매우 잘함 - 그렇지! 바로 이거야!


비난을 쏟아 넣고 있는 건 아닐까요?

노력 바람 - 이게 한 거니? 잠자는 시간도 아껴.
보통 - 이 정도 해선 택도 없어.
잘함 - 잘했네. 그래도 조금만 더 해 봐.
매우 잘함 - 유지해. 절대 떨어지지 마.


제게 거창한 대안이, 교육 체계 변화 같은 원대한 계획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시험을 왜 쳐야 하냐는 아이에게 그럼 교육을 어떻게 시키냐며 되려 시험을 두둔하는 평범한 아이 엄마일 뿐입니다.


그저, 이 ‘공부의 단계 나눔’ 이 한 명의 아이를 판단하는 단 하나의 수단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겁니다.


빛은 온갖 방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데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앞쪽의 커다란 빛을 향해 가는 모습이 지금의 우리 모습 같아서입니다.


아프리카에 스프링벅이라는 양이 있다고 합니다.

(사진을 찾아보니 전혀 양 같지 않은 뿔이 난 사슴 같습니다.)

이 양은 무리가 커지면 뒤처진 양들이 풀을 먹을 수 없어 앞서가고, 앞서가던 양들은 뒤처지지 않으려 더욱 앞서가려 한답니다. 어느 순간 풀을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다른 양보다 앞서가려 뛰기만 하다 절벽이 나타나면 멈출 수 없어 떨어져 죽는 양의 이야기를 ‘스프링벅’이라는 배유안 님의 책에서 읽었습니다.


앞으로 먹이를 찾아가는 것은 생존이 달린 중요한 일이지만, 먹이를 위해서가 아닌, 무엇을 위해 뛰는지 잊어버린 순간부터 양들은 이미 죽은 것과 다름 없어집니다.

벼랑이든, 포식자의 입이든, 그들에게는 이미 보이지 않고 바로 곁에  자신과 똑같은 양의 뜀박질만 보며 뛰어갈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어처구니없는 짓을 우리가 하고 있는 것 같다. 왜 경쟁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경쟁하는데 습관이 들어서 피 터지게 달리기만 하고 있어.
결과가 보이지 않니?.... 지금 이 순간순간이 너희들의 삶이야.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풀을 뜯어먹으라고. 풀, 맛있는 풀!
향기도 맡고 맛도 음미하면서 천천히 가라고. 삶의 목적은 풀밭 끝 벼랑이 아니고 풀이야, 풀. 지금 너희들 옆에 자라는 싱싱한 풀이라고. 가다가 계획과 다른 길로 가게 되더라도 뭐가 걱정이니? 거기도 풀이 있는데. 못 먹어본 풀이 있어서 더 좋을 수도 있지. 빙 둘러간다고 결코 낭비가 아니야. 생각지 못한 절경을 즐기면서 갈 수도...

스프링벅 중에서. 배유안


노력 바람의 풀은 쓰지만 상처를 치료하고

보통의 풀은 무맛으로 마음을 안정시키며

잘함의 풀은 단맛을 내어 자신감을 북돋우고

매우 잘함의 풀은 은은한 향내를 퍼트려 곁에 있는 이들을 돌아보는 배려를 일깨운다.


고 생각한다면,

골고루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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