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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진 Jul 31. 2021

우리 화재에서 살아 나왔다니까!



큰아이가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고 싶다는 핑계로 ‘파파’를 하겠다며, 일이 있어 저희 집 근처에 온 친구 가족을 따라 가버렸습니다. ‘파파’는 ‘파자마 파티’를  뜻하는 아이들의 은어입니다.

친한 가족이라 하루 재워서 영화관에 데리고 갔다 보내겠다는 말에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지요.


하루가 지난 다음날 아침에 아이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 전화를 했더니 받지 않습니다. 아이의 친구에게, 그 엄마에게도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길래 일찍 영화관에 갔겠거니 했습니다.


그리곤 다시 걸려온 전화로 아이의 친구 집에 불이 났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대략적인 이야기를 듣고 전화를 끊어야 했습니다. 전화 너머로 많은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아이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받지 않습니다.

갑자기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아이는 괜찮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갑자기 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뻗쳐갑니다.

다시 전화를 했습니다.

아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이가 제 입으로 괜찮다고 다치진 않았다고 말하니 그제야 맘이 놓였습니다. 아이는 단지 놀라서 우는 것뿐, 연기를 피해 아파트 1층에 내려와 있으니 더는 위험한 상황은 없을 듯했습니다.


상황이 얼마만큼 정리가 되고 있는 것인지 보질 못하니 불안한 마음이 쉽게 사그라들진 않았습니다.

마침 다시 걸려온 전화는 집에 연기가 가득 차 그을음과 탄 냄새가 가득하다는 좀 더 자세한 상황설명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러 와주었으면 하는 부탁이었습니다.


불이 난 지점은 에어컨 실외기의 전선이라고 합니다.

폭염에 발생 확률이 높아지는 실외기실 화재는 사실, 실외기 자체보다는 전선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전선의 피복이 벗겨져 있었는지, 과열로 스파크가 튀어 불이 난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가 없기에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습니다.


벽 쪽의 전기선에서 치솟은 불길이 실외기실 벽안의 단열재로 보이는 물질을 태워서 실외기실뿐 아니라 집 전체에 그을음과 까만 연기를 내보낸 듯합니다.


집에서 외진 실외기실에서 불이 났으니 집에 사람이 없었다거나, 아이만 혼자 집에 있었다면 위험할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마침 주말이었고, 맞벌이를 하는 부부가 집에 있었으니 그나마 빠른 대처가 가능했습니다.


탄 냄새를 먼저 알아챈 건 아이의 친구였고, 소화기를 찾아준 것도, 119에 화재신고를 한 것도 아이의 친구라고 하니 그리 기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아이인지라 실외기실에 번진 불이 이글거리며  까만 연기를 집안으로 내뿜어대는 장면은 꽤나 충격적이었을 테고 제 역할을 백분 발휘한 뒤에는 잠옷 차림으로 뛰어나가 둘이 서서 울고 있었나 봅니다. 주민 한분이 경비실에 부탁하여 코로나로 닫힌 도서관을 열어 아이들에게 있을 공간을 내어주셨다 하니 그리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후에 아이들에게 들으니 한 여자분이 남편이 소방관이라며 올라갔으니 괜찮다고 아이들을 안심시켰다고 합니다. 같은 주민이 소방관이라니 든든한 마음이 드는 것과 동시에 그분이 아기를 안고 있었다는 말에 존경스러운 마음이 절로 생겨납니다.

(대한민국 소방관분들과 그들의 가족분 모두, 항상 평안하시길 마음 깊이 바랍니다. )


불은 잠깐 이었는데 수습은 어렵고 복잡하고 오래 걸립니다.

따로 들어놓은 보험이 없어 관리사무소에 아파트 화재보험에 대해 문의하고, 보험 약관을 확인합니다.

보험사에서 빠르게 손해사정인을 파견해준다 하니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맨 먼저 화재 청소 업체가 불 탄 자재들을 수거하고 최대한 그을음 제거 작업을 해야 합니다.

전기선이 녹았으니 전기팀을 불러 안전하게 전기도 손봐야 합니다.

에어컨 AS에 연락하여 실외기 수거를 요청하고

실외기실 벽이 녹아내렸으니 인테리어 업체를 불러 시멘트 미장을 해야 합니다.

외부새시가 시커멓게 변한 것도 갈지 않으면 탄 냄새가 계속 날지도 모른다고 하네요.

실외기실과 붙어있던 안방에는 벽지와 천장에 까만 재가 달라붙어 다시 도배를 해야 합니다.

이 모든 절차가 각자 다른 업체를 통해 순차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업체들은 이미 잡혀있는 스케줄로 당장 공사를 해 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씩 일정을 잡고, 하루 이틀은 허송세월을 보내며 다음 팀을 기다려야 하는데 이 더운 여름 날씨에 에어컨을 켤 수 없는 건 곤욕입니다.


이외에 해야 할 일들은 더 있습니다.

그을음이 훑고 지나간 바닥, 책, 이불, 옷, 가방 등은 고스란히 숙제로 쌓였습니다.


연기를 마셔 머리가 아플 수 있으니 증상이 있으면 꼭 병원에 가라는 소방관의 당부도,

실외기실 앞을 치우다 발견한 캠핑 가방 안의 부탄가스도,

화재로 놀란 후 억지로 진정시켜 놓은 마음에 툭, 툭 돌을 던지는 것만 같습니다.


놀란 일들과 수습해야 할 수많은 일들 앞에

멍하니 서있는 부부를 남겨놓고

아이 둘을 데리고 왔습니다.

보호해야 할 존재가 안전한 곳에 있는 것만으로

마음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될 테고,

해야만 하는 일에 속도를 낼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화재에서 살아 나왔다’며 좋아하는 파스타집 이름을 대며 외식을 요구합니다.

제가 거절하자 ‘불길에서 살아 나왔다’로 좀 더 극적인 문장으로 바꾸어 말합니다.

덧붙여, 보기로 했던 영화를 언제 보러 갈 수 있냐며 자신들의 요구를 다시 한번 명확히 합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네, 요구 사항을 이행해드려야죠.

못 이기는 척 영화관에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혼자 마음을 쓸어내립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누구도 다치지 않아서 말입니다.








사진 출처 : Unsplash - Matthew Le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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