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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진 Aug 10. 2021

입이 절로 다물어질 때가 있다.



어릴 때 아버지는 화가 나면 입을 꾹 닫고 말을 안 하셨다.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을 있는 대로 담아 와르르 쏟아붓는 것처럼 쏟아내도 아버지는 꿈쩍도 않으셨다.

엄마는 매번 아버지가 화가 나면 말을 안 한다고, 답답해 죽겠다며 나를 붙잡고 하소연하듯 말했다.


나이가 좀 들자 나는 화가 나면 입을 닫았다.

그게 엄마를 상대하는 유일한 방패라 생각했는지, 하도 많이 들어 아버지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매번 엄마에게 ‘지 아버지 닮아서 화나면 똑같이 말을 안 한다’는 푸념을 들었을 뿐이다.


내게 내 엄마와 아이들은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모르고 다른 일로 화풀이하듯 화를 쏟아낸다. 이게 화풀이야.라고 알려줘도 절대 인정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상태 탓을 한다. 내가 이러는 건 전부 너 때문이야. 하고 싶은 말을 쌓고 또 쌓아 상대의 키를 넘기기라도 할 듯 반복한다.


아이를 대하면서 엄마를 대하는 방법에도 해법을 찾기 시작했다.

아이 앞에서 입을 다무는 걸로 응수할 수는 없으니 잠깐의 휴지기를 가진 후 약간의 장난스러움을 넣은 목소리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도 기다렸다는 듯 내가 열어 준 화해의 길로 뛰어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의 진심을 헤아려 보려 더듬더듬 말을 건져 올려 내게 보였다. 밟아 찌그러진 깡통 같은 마음을 안고 있는 건 보는 사람뿐 아니라 당사자에게도 퍽이나 불편한 일이니, 약간의 틈만 내어주어도 툭 떨어지고 말 것이란 걸 아이를 보며 알았다.


엄마에게 나는 항상 입을 닫았다. 그게 어린 내가 엄마에게 상처 받지 않는 유일한 방어벽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이 든 엄마가 내게 가장 서운해하는 건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는 딸이었다. 네가 내 딸이니 이런 말도 하지. 네가 여자니까 내 마음을 알 것 아니니. 네가 애를 키워봤으니 날 이해하지 않니. 네가. 네가. 네가.


사실 아이를 키우며 어릴 적 내가 느꼈던 보호받지 못한다는 불안함과 사랑 받음에 대한 결핍은 한동안 역작용해서 엄마와 말 한마디 주고받는 것이 힘들었다. 별 것 아닌 말에도 가시 돋친 말로 응수했고 엄마는 돌아서서 가 버렸다.

예를 들어 소고기를 먹이려고 애쓰는 내게 애들은 밥만 먹어도 큰다, 밥에 김만 줘도 큰다. 라던가

반장선거 나간다는 아이 말을 듣고 못 하게 막으라며 학교에서 엄청 귀찮게 오라 가라 하니 절대 하지 말라 해라라던가.

지금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애들이 고기를 더 잘 먹어. 애가 반장 한대. 정도로 흘려보낼 수 있는 정도에 이르렀다. 가끔 아이들에게 하는 만큼은 아니어도 장난기 있는 목소리로 웃으며 넘기기도 한다.

 내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지금의 엄마만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많이 늙고 많이 외로워하는 엄마를.


엄마의 전화는 세 가지 종류이다.

하나는 단순한 안부 전화,

하나는 필요한 걸 사달라는 부탁 전화,

하나는 내다 버릴 감정을 쏟아낼 사람이 필요한 전화.

(감정의 쓰레기통 이라곤 하지 않고 싶다. 나는 쓰레기통 역할을 하지 않고 뚜껑을 빙그르르 돌려 튕겨내버리니까.)


안부전화는 대답만으로 끝난다. 그저 응응. 이라고만 하면 된다.

부탁 전화는 미안한데.로 시작해서 미안해.로 끝난다. 나는 항상 괜찮아 말해.로 시작해서 괜찮아 알았어.로 끝낸다.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전화는 말을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잘못 고르면 니는 엄마한테 말을 그렇게 밖에 못 하나? 하고 끊기던가 니는 모른다 내 마음을. 하고 끊기던 가다.

잘 골랐다면 그래 답답해서 전화 해 봤다 내가 니 말고 말할 사람이 없다. 하고 끊긴다.


어렵다.

내게 엄마는 보호해야 할 존재이며 여전히 세상살이에 어리숙하지만 자신의 기분을 온전히 내뿜으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지만 내 기억이 닿지 않는 곳에서 엄마는 나를 낳아서 키워냈고 가난한 인생을 살아내느라 고달팠을 테다.

아이는 살피고 보호하는 게 아니라 낳아서 두면 제 알아서 큰다는 어른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식당 주방일을 전전하며 돈을 벌었을 엄마가 왜 안타깝지 않을까.

마음에 겹겹이 쌓인 오랜 감정을 긁어내 바닥으로 떨어뜨려 보려는 이유다.




Unsplash - Milada Vigero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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