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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진 Sep 18. 2021

마닐라는 그녀를 행복하게 한다.

아이의 필리핀 화상영어 선생님.


마닐라는 그녀를 행복하게 한다.

종이의 집. CASA de PAPEL.


마닐라는 필리핀의 수도입니다.

종이의 집은 스페인에서 만든 드라마로 은행 강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극에서 주인공들은 각 나라의 수도 이름으로 서로를 부릅니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종이의 집 5 시즌이 나왔는데 새로운 인물이 추가되면서 마닐라가 등장했습니다.

필리핀 화상영어 선생님은 아이에게 포스터를 보여주며  마닐라가 나와서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답니다.

그러고 보니 왜 서울은 안 나오는 걸까요? 도쿄는 무리 중에서도 내레이션까지 도맡아 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인데 말입니다.

갑자기 괜한 곳에 신경이 꽂힙니다.

그래도 사실, 너무 좋아하는 드라마입니다.


선생님이 아이에게 보여준 포스터의 제목이 우리와 다릅니다.

책이나 영화 포스터를 각 나라의 정서에 맞춰서 다르게 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종이의 집은 한글 제목 위에 스페인어로도 적혀 있어서 같은 이름일 줄 알았습니다.


필리핀 제목은 MONEY HEIST입니다.

세상에.

돈 강탈 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제목입니다.

이 드라마는 뺏으려는 자와 안 뺏기려는 자의 두뇌싸움이 주를 이루거든요.

체스판의 수 처럼 한수 놓고 앞으로 몇 수를 읽는 그 치열한 기물 싸움처럼, 그 몰입도와 짜릿함에 마음이 녹아내려 찰나도 눈을 떼지 못하고 열광하며 보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저 뻔하고 단순한 제목은 셜록 뺨치는 강도들의 대장, 프로페서가 보면 얼마나 실망스러울까요?

하긴, 종이의 집을 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프로페서는 분명.. 도면을 펼치며 앞으로 바꿀 제목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가 선생님께 마닐라가 필리핀 느낌이 아니라 영어 이름인 줄 알았다고 하니 선생님께서 마닐라를 필리핀 본토 발음으로 발음해 주십니다.

“마이, 니일, 라!”

아이가 필리핀 말로는 마닐라를 좀 더 귀엽게 발음하는 것 같다며 웃습니다.




아이는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화상영어를 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5번, 평일 동안 매일 20분씩 필리핀 선생님과 대화를 했지요.

처음에는 교재로, 지금은 해야 할 말이 많다며 아이가 프리토킹을 원해서 교재를 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드라마나 배우가 주요 대화 주제이고

선생님이 좋아하는 드라마나 한국 예능도 자주 주제에 오릅니다.

아이가 부르기 시작한 팝송 The only exception 도 선생님이 한국 예능 ‘바라던 바다’에서 로제의 영상을 추천해주셔서 알게 된 노래입니다.


아이가 기타를 가져가 노래하며 기타를 치면

선생님은 까르르 웃으며 박수를 쳐주고,

아이가 이 노래를 기타로 치고 싶다 하면

기타를 칠 줄 아는 선생님은 바로 기타 코드를 알려주십니다.


응답하라 1988의 영상 캡처본을 띄워놓고 영문자막을 보며 번역과 한국말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매일 코로나 확진자수를 공유하고,

월의 이름에 ber가 들어가는 9월부터 ber Month라고 해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해 캐럴을 듣는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려주십니다.


둘은 화상 영어가 아닌 화상 문화 공유를 하고 있는 듯합니다.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와르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는데 너무 양이 많은지라 들어주며 맞장구치던 저도 지쳐서 이제 그만.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모자란 부분을 아이는 친구와 화상영어 선생님과 공유하는 듯합니다.

이 나이대에 아이들이 공감받고 있다는 느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저는 절로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제게 필리핀 영어는 발음이 이상해서 싫다는 말을 하는 분이 계셨는데 저는 선생님의 발음이 이상한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영어를 하지는 못해도 듣는 귀는 있으니까요.

오히려 한국의 문화와 연예계에 관심이 많은 동남아 지역이라 아이와 대화를 나누기에 너무 좋고 정서적 공감까지 이루어지는 듯합니다.





저와 같은 드라마를 좋아하는 필리핀 화상영어 선생님.

저도 선생님과 꺅꺅거리며 드라마에 대해 대화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언어의 장벽이란 제게 너무 높네요.


종이의 집에서 필리핀의 수도가 나왔으니 한국의 수도도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요?

서울은 조금 차분한 저격수의 느낌이 나는 것 같습니다.

아이가 성장해서 함께 종이의 집을 볼 나이가 되면

강도 서울이 나와서 엄마는 너무 좋았다고 이야기 할 겁니다.

아.. 아이와 강도 드라마를 볼 꿈을 꾸는 엄마라니..



공유 할 수 있고,

공감 한다는 건,

무척이나 행복한 일입니다.









-Picture by Ayiman Mohanty i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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