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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진 Sep 27. 2021

겉만 번지르르한 상꼬맹이, 내 딸.


세탁기를 열었는데 뜨끈한 옷이 나왔습니다.

‘삶음 빨래를 돌렸나?

좀 전에 빨래통에 빨래를 두러 간 아이에게 세탁기를 켜서 한 칸만 돌리고 시작 버튼을 눌러 달라했는데..

탈수를 강으로 했나?‘

의아해하며 빨래를 두어 개 더 꺼내 들었습니다.

당황스럽게 빨래가 뽀송했습니다.


"딸아! 딸! 아까 뭐 눌렀어?"


"엄마가 한 칸 돌리라길래 이거 한 칸 돌렸는데?"


아이는 태연하게도 가운데 커다란 다이얼 대신 오른쪽 위에 자그마한 다이얼을 가리켰습니다.

그 아래에 ‘건조‘라고 쓰여 있는 다이얼을.

세탁기를 쓰면서 건드려 본 적이 없는 다이얼입니다.

더욱이 건조기가 세탁기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은 후로는 더욱 그 필요성이 없어진 다이얼.


아이는 정면에 커다란 다이얼보다 구석에 작은 다이얼에게 쓰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던 걸까요?

힘차게 남편을 불러봅니다.

"남편! 남편!"

급박한 내 목소리에 빠르게 달려온 남편에게 말합니다.

"얘가 이걸 돌려서 빨래가 이래!"


남편이 호탕하게 웃습니다. 하하하하하하.

아빠의 긴 웃음에 민망한 듯 딸이 말합니다.

"그러게 왜 나한테 시켜."


코딩 학원에서 아이에게 세탁기 돌리는 법부터 알려줘야 한다는 말에 코웃음을 쳤었습니다.

그걸 누가 못한다고. 글자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빨래 넣고, 세재 넣고, 문 닫고, 전원 켜서 표준으로 플레이 버튼 하나 누르면 되는 것을,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똑똑한데!


제 생각이 틀렸다는 걸 절로 되뇌며 인정하게 됩니다.

‘아. 못하는구나. 못하는 거였구나. 하나하나 가르쳐야 하는구나.‘

외관은 갈수록 업그레이드가 되어가고 있는데

속은 그저, 꼬맹입니다.


얼마 전, 하염없이 김치를 볶던 딸.

김치볶음밥을 좋아하는 아이가

처음, 자기가 한번 해보겠다고 나선 날이었습니다.

팬 안의 김치는 아이에게 볶이다 못해 까맣게 시들어져 가고

팬 바닥이 타면서 올라온 까만 부스러기가 김치와 손잡고 둥글게 둥글게 춤을 추는 걸 보면서도

아이의 볶음 주먹은 그저 춤판을 거들뿐

어떤 제재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보던 아이.

이미 다 탔다고 말하며 싱크대에 까만 김치를 버릴 때도

"어떻게 알아, 탔는지? 팬 바닥이 까매서 안 보여."

라며 어리둥절하던 내 딸이었네요.


그래도,

김치볶음밥은 그렇다 쳐도, 세탁기는 돌릴 줄 알았죠.

키와 몸무게는 이미 나와 비슷해져서

내 옷을 들고 눈웃음치며

‘엄마, 나 이거 입어도 돼? ’하기 일쑤이고

현관에서 신으려던 내 신발이 사라지는 마법도 부리는 아이거든요.

앞머리를 자르고 싶다더니

혼자 미용실에 다녀와선 깡뚱한 앞머리로 나타나고

밤새 구르프와 함께 굴러다니니

피부의 주름살과 탄력만 빼면

나와 다를 게 없다 여겼나 봅니다.


언제부터 부끄러운 줄 모르고 아이와 어른을 외모로 혼동하고 있었을까요. 아이가 이만큼이나 컸다는 뿌듯함이 판단을 흐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순간순간 보이는 아이의 고운 자태에 감탄하여 스스로 콩깍지를 뒤집어써버린 철없는 엄마.


돌이켜보면 스스로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도,

아이는 엄마가 책 읽어주는 시간을 놓치지 않고 좋아했습니다.

못해서가 아니라 그저 엄마 곁에 딱 붙어 앉아있는 시간이, 엄마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듣는 그 시간의 따스함을 좋아해서일 거라 막연히 생각했지요.

그때 저는 아이에게 왜 혼자 읽지 않냐고 타박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읽어달라고 가지고 오는 책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책을 통한 성장’과 ‘생활 속의 성장’ 이 다를 것이 뭐가 있을까요?


한글을 따로 가르친 적은 없지만 수많은 책을 들으면서 아이는 글자를 알아갔습니다.

하지만 세탁기의 설명서는 읽어 줄 필요 없이

두세 번만 직접 보여줘도 거뜬히 해 낼 것이었는데,

잘했다 몇 번 토닥여주면 먼저 하겠다 나섰을지도 모를진대, 한번 알려주지도 않고 못한다 놀려댔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필요 없어진 물건을 넣는 쓰레기통과 더러워진 옷을 넣는 세탁기는 아이에게 그다지 다를 바 없었을 물건이었습니다.

넣기만 할 뿐, 빼 본 적도 없고, 이걸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을 테니 말입니다.


자, 그럼 이제 어떡할까요?

아이의 외모 성장을 막을 수도 없고,

나도 모르게 아이의 성장을 과대평가하는 버릇도 쉬이 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제게  ‘나쁜 버릇’이 생겨 버린 것입니다.

버릇은 꾸준한 노력으로 조금씩 변화시켜 나갈 수밖에 없네요.


하루에 한 번씩 되뇌어 봐야겠습니다.

‘내 딸은 아직 꼬맹이다. 겉만 번지르르하다.

상꼬맹이다.‘


“엄마, 버스 어떻게 타? “

"버스? 여기서 타서 거기서 내리면 돼. 왜? 못 타겠어?

그래.. 엄마가 같이 타 줄게. 꼬맹아."


‘내 딸은 아직 꼬맹이다. 겉만 번지르르하다.

상꼬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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