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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진 May 24. 2021

경력단절녀의 헛된 쇼핑

쇼핑은 심사숙고하여야 한다.

스스로 원했든 원치 않든

경력단절녀가 된 젊줌마들은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여유시간이 생겨나면 일을 꿈꾼다.

언제부터 일 하는 걸 꿈꿨을까?

아이를 키우면서 대답도 없는 아이에게 혼자 묻고 혼자 답하며 사람과 하는 ‘진짜 대화’가 그리웠을 때부터?

엑셀 작업 파일이든, 수없이 인쇄된 A4용지 더미 속이든, 무언가를 집중하고 해낼 수 있는 단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느꼈을 때부터?

어쨌든 집에서 전혀 노는 것 같지 않지만 ‘집에서 노니?’ 란 말을 들으면서 또 다른 ‘할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도 나도 한다는 공인중개사에 눈이 꽂혔다.

친구 남편도 아내에게 권하고, 애들 고모가 200이 넘는 거금을 들여 주 6일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남편 친구는 ‘넌 어쨌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으니 될 거야’ 란 말을 스스럼없이 던졌다.

자연스레 인터넷으로 공인중개사 시험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고 수많은 사이트를 거치고 거쳐 매년 역대 최고 합격자를 배출한다는 자격증 사이트에 멈춰 섰다.

노란 합격 수건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흔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진은 시작도 하기 전에 머릿속에서 부푼 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애들 고모는 학창 시절에 그리 공부를 잘하지 못한 것 같았는데 도전하고 될 것 같다고 자신하잖아. 나는 쉽게 습득하는 편이니 인터넷 강의만으로도 될 거야. 붙기만 하면 쉽게 돈을 벌지 않을까?’

부푸는 꿈은 30대 아줌마인 나를 다시 어리석고 어린 20대로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20대처럼 앞만 보고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몸에서 후두둑 후두둑 뭔가 떨어지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나는 희망찬 사람이니까.


드디어 인강을 쇼핑하기 시작했다.

최종 합격 시 수강료 100% 환급, 50만 원으로 빠른 합격 완성, 출제 예상 이론 단기 특강 등 여러 메뉴가 번쩍거리며 빨간 동그라미를 마치 합격증처럼 매달고 있었다.

그중 내 눈에 띈 것은 ‘평생 인강 연장 이용권’이었는데 ‘합격할 때까지 평생 연장’이라는 문구를 달고 있는 세상 매력적인 메뉴였다.

1년 인강이 70만 원 정도인데 20만 원 정도만 더 내면  평생 이용권이라 시험에 응시만 해도 자동 연장이 된다는 말이었다.

평. 생.

‘그래, 1년 만에는 좀 힘들 수도 있으니 평생을 끊어보자.

12개월 할부로 하지 뭐. 그럼 티도 안 날 거야.

공부 안 해도 언젠간 하겠지. 시험만 쳐서 연장만 꼬박꼬박 시켜놓자.’

나는 과감하게 결제 버튼을 눌렀다.


기초서, 기본서, 심화서, 핵심 풀이집, 모의 고사지.

집으로 배달되어오는 수많은 샛노란 책중에 내가 들춰본 건 단 2권. 인강은 내게 맞는 선생님을 찾는데만 한참 걸린 데다 집에서 그걸 보고 있으려니 띠로리 띠로리 하며 우는 빨래를 옮겨야 하고, 아이들 오기 전에 간식도 좀 해두어야 하고, 저녁을 뭘로 먹지 란 생각도 계속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쳐놓은 덫에 온몸을 날려 잡아가 달라고 애원하는 꼴이 바로 나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제외’라는 단서 조항이라도 달려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면 인강은 총 몇 강이며 다 들으려면 몇백 시간이 걸린다는 기초적 진실에 입각한 총계 라도 떡하니 써 놓았어야지. 책을 읽어보고 인강 몇 개를 듣고 어설픈 수험생 흉내를 내며 내가 처한 현실을 알게 되면 될수록 나는 점점 치졸해져가고 있었다.


시험 접수가 시작되었다.

오전에 집안일로 바빠 오후에 문자에 링크된 접수창을 열었다. 가까운 경기지역 마감, 가까운 서울지역 마감.

이 시험을 보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던가, 암담한 기분으로 제일 가까운 곳을 검색해봤으나 1시간 거리에 있는 대학교 한 곳뿐이었다. 결국 그곳으로 시험 접수를 하고 친구에게 미리 부탁을 했다. 친구는 너무 이른 시간이니 전날 자신의 집에서 자는 게 어떠냐는 제안까지 해왔다. 역시 사려 깊은 내 친구 덕에 쉽게 시험 보러 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다시 안심되는 기분이었다. 시험을 치기만 하면 합격하는 것도 아닌데 왜 안심이 됐던 걸까?


시험이 있기 일주일 전,

아이의 어린이집에서 운동회 계획을 발표했다.

아이에게 어린이집에서 운동회가 있지만 우리는 친구 집에 가서 자고 하루 종일 놀자며 희망찬 계획을 설명했다. 아이는 내 계획에 좋다며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날려주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어린이집을 다녀올 때마다 아이의 마음은 돌아서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선물도 준댔어.”,”선생님이 춤도 춰주신대.”,”선생님이 엄청 재밌을 거래.”

슬금슬금 어두운 구름이 드리우고 있었고 나는 애써 외면했다.

운동회 전날 어린이집을 다녀온 아이는 꼭 가야 한다며, 그것도 제일 1등으로 가야 한다며 바락바락 우겨댔다. 어떠한 회유책도 소용이 없었다. 어떠한 대안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빠는 새벽부터 일을 해야 했고 일이 끝날 때쯤엔 운동회도 끝나 있을 시간이었다.


시험만 쳐도 연장인데, 연장하는 것이 인강의 기간인 건지, 시험에 대한 미련인 건지,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대한 부담감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얼 평생 연장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평생 인터넷 강의 수강권을 내손에서 놓아버리고 아이의 손을 다시 잡았다. 노란 합격 플랜카드에 혹해 가장 후회스러운 쇼핑은 인강 쇼핑으로 남았다. 그것도 충동구매인 걸로.

집안 한쪽 구석에 높이 쌓여있는 샛노란 책은 볼 때마다 뜨끔하다.

자, 이제 뭘 다시 찾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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